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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훌리오와 에밀리아] 사랑을 분재한 남자의 이야기, 문학에 심취한 때때로 궁상맞은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남자는 마음 속에 여러 개의 방을 두고 산다.

훌리오라는 남자도 그러하다. 8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흐르는 것이었을 뿐 마음 속에 에밀리아의 방이 남아있는 것엔 변함이 없다. 그의 말대로 그는 살았고 에밀리아는 죽었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 때의 마음은 지금의 마음으로 옮겨져 분재되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장을 읽고 있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중심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문학에 심취한, 때때로 궁상맞은 남자 ‘훌리오의 이야기’이다.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고 심지어 국내 개봉 제목도 <훌리오와 에밀리아>이긴 하나 모든 것은 훌리오의 기억과 생각에 의한 것일 뿐이니 ‘훌리오의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이다.

‘프루스트를 읽어본 사람 손들어 봐’ 교수의 질문에 손을 들면서 풋풋하게 시작되는 대학 생활. 스터디를 빙자한 파티가 이어지고 그 사이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보통의 청춘들처럼 연애를 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 후의 훌리오는 유명 작가의 소설을 타이핑하는 일을 하려했다가 무산되고 그 참에 우연찮게 소설을 쓰게 된다. 그러면서 훌리오는 에밀리아와의 과거를 하나씩 꺼내 소설 속에 넣고 추억한다.

  

 

영화는 문학에 의해 성장한 사람이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마치 문학이 없는 세상에서는 하루도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자아가 문학을 끌어안고 짓이긴 것 같다. 훌리오라는 인물 자체가 문학의 세상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고 자연스레 영화의 감독도 문학애호가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문학은 묘하게 거짓말과 연관을 짓는다. 훌리오와 에밀리아의 의미 있는 대화의 시작에는 ‘정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느냐’는 주제가 등장한다. 그는 다 읽지도 않은 (말 그대로) ‘가슴에 새겨진’ 책을 이미 다 읽었노라 재차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마치 그 거짓말을 수습하기라도 하려는 듯 도서관에서 전작을 빌려와 하루에 한 장씩 읽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 거짓말은 8년 뒤에도 이어진다. 훌리오는 유명 작가의 소설을 타이핑 하는 일이 무산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고하지 않는다. 그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도록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마음 속 방 안에 놓인 에밀리아의 기억을 하나씩 추억한다. 작가의 자필 노트로 위장하기 위해 찻잔 자국을 노트에 남기는 치밀함은 귀엽게 보아 넘길 수 있으면서도 어떤 징글징글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왜 그가 저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다 보면 훌리오가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문학과 그가 문학이라는 것을 대하는 맹종처럼 보이는 징글징글함이 느껴진다. 맹종하는 것에 대한 추앙은 그로 하여금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그 ‘픽션’이 제공하는 안식의 범주에서 그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자신에게 문학 이상으로 깊게 새겨졌을 에밀리아에 대한 추억되새김도 그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진행한다. 훌리오가 거짓말로 시작한 자신의 소설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결국 문학의 멋이 주는 안식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제 마음 속 에밀리아의 방 들여다보기의 맛에 심취해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Bonsai’는 ‘분재’, 즉 한자 ‘盆栽’의 일본어식 발음이 서구에 전달된 그대로 ‘반사이’로 발음되어 사용된 것이다. 분재는 훌리오의 사랑의 표식이기도 하고 과거의 사랑을 옮겨둔 작은 방이기도 하다. 에밀리아의 생일에 훌리오는 뭔가 특별한 걸 해주고 싶어 고민하다가 우연히 클로버 화분을 선물한다. 그 화분을 두고 에밀리아의 룸메이트는 프루스트 소설 속 ‘탄탈리아’를 언급하며 불길한 기운을 전한다. 선물을 받은 에밀리아가 화분을 보면서 점점 보기 흉해진다고 했을 때, 시들어버린 화분이 비춰질 때, 8년 후 훌리오가 화분을 정성스레 분재할 때, 그리고 분재한 화분을 창가에 두고 가꿀 때 그것은 사랑이었고 사랑이 흘러가는 길이었으리라.

앞서 문학과 거짓말의 묘한 앙상블을 언급했듯 분재도 문학에 묘한 가지를 뻗고 있다. 분재라는 행위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문학이 소통하는 방식이나 문학을 다루는 작가나 독자 각자의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원래의 식물을 화분에 옮겨 담으며 다듬고 가지를 엮는 등의 변형을 가하여 미적으로 뛰어나게 만들거나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분재’라는 작업은 소재를 글로 가공하는 작가의 과정과도 같다할 수 있겠고 그 글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용 과정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훌리오는 사랑의 주체였고 프루스트를 읽으려고 했던 독자였다. 한편 훌리오는 사랑의 대상이었고 소설을 쓰는 주체였다. 훌리오는 화분을 선물했던 주체였고 분재를 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소설을 쓰고 분재를 하는 훌리오에게 지난 사랑의 기억은 분재를 할 수 있는 식물과도 같은 소재가 될 것이다. 그것을 어떤 화분에 담고 어떻게 가공할지는 순전히 작가, 분재를 하는 자에게 달려져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훌리오는 살아있고 에밀리아는 죽는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픽션이다’라는 정보를 전한다. 과거와 그 과거로부터 8년이 흐른 때의 이야기가 모두 훌리오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분명히 에밀리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철저히 훌리오에 의해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에밀리아의 사인에 대한 추측에도 적용된다. 훌리오는 에밀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서관을 찾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장을 읽고 이제는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은 훌리오가 ‘분재’를 하면서 화초에 대한 자기 해석을 하고 새 화분 안에 구성했던 것처럼 에밀리아에 대한 모든 추억도 자기 해석을 하고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지난 사랑의 죽음을 대하는 애절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안에 지난 사랑에 대한 방을 만들어 그 방 안을 틈틈이 들여다보던 남자가 그 방 안에 그 사랑의 슬픈 모습이라는 가구 하나를 들여놓는 (자칫 궁상스러워* 보이는) 의식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해는 고스란히 프루스트의 작품에 대한 예술가들의 재현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알려진 대로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자체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또 다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프루스트의 원작은 몇몇 예술가들의 생각과 손을 거쳐 <훌리오와 에밀리아>라는 영화로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 <마들렌>의 경우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을 언급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영화다. 그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각각 영감을 얻고 자기화하여 작품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의 창작열을 돋우는 원작은 마치 식물이 분재의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또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새 화분에 담겨지게 된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분재를 소재로 등장시킨 이 영화를 본 관객은 관객으로서 ‘분재’ 작업을 거쳐 이 작품을 수용하고 느끼게 된다. 똑같은 화분을 놓고도 보기 흉하다고 말한 에밀리아가 있었고 정성스레 보살핀 훌리오가 있었듯이 작품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다양하게 관객의 마음 속으로 분재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보통 영화의 수용에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감상적인 이해에 더 중점을 두게 되는 것도 그 수용방식이 분재의 방식과도 같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글도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마음 속에 분재한 자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궁상맞다

훌리오는 정말 문학이 전부인 사람 같다. 아니지. 문학, 분재, 사랑이 전부겠지. 읽든 안 읽든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만년필을 놓지 않는다. 심지어 갖고 있는 책을 팔아 용돈을 충당한다. 에밀리아를 다시 만나려고 했을 때도 책을 팔았고, 다시 볼 수 없음을 알게 됐을 때도 그 책 판 돈 만큼 택시를 탄다. 그 사랑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도 문학 안에서다. 분재도 결국 문학과 속성이 같기 때문에 해나가는 것이리라. 

그게 나는 궁상맞아 보였다. 그것 하나밖에 모르는 자에 대한 측은함이랄까. ‘꼴보기 싫어’의 궁상이 아니라 ‘어떡하지 너’의 궁상. 가뜩이나 길어버린 콧수염과 한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