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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위험한 관계] 원작의 위대함만을 다시금 느끼게 한 범작

 

최근 개봉한 <위험한 관계>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영화로 옮긴 여러 편 중 한 편이다. 다른 작품들과 이 작품을 구분하여 설명하자면 허진호 감독과 장동건 배우라는 한국의 영화인이 투입되어 완성된 중국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또는 장동건, 장백지, 장쯔이 이렇게 세 명의 장씨 성을 지닌 배우가 연기한 '3장의 위험한 관계'라고 설명하고 싶다.

 

중국 영화에 한국의 영화인이 투입된 형태인지라 이 영화는 확실히 중국에서 리메이크한 <위험한 관계>로 보는 게 좋겠다. 배경도 1930년대 상하이이고 대사도 중국어이니까 말이다. 허영으로 가득한 상류사회가 있고 그 상류사회를 주름잡는 파워를 지닌 여성과 상류사회를 휘젓는 밤의 황제인 남성이 등장하고 그런 계통에서 꼭 있기 마련인 순수한 여성의 등장은 앞서 만들어진 모든 영화에서 시공간을 망라하고 모두 적용 가능했으니 상하이에서라고 예외랄 것 없이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원작이 그만큼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품고 있고 탄탄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증거이고 중국판 <위험한 관계>는 그 완벽한 캐릭터와 관계도를 고스란히 1930년대 상하이에 녹여낸 것이다.

자꾸 중국판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 감독의 크레딧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진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지금껏 내 영화에서 사용한 컷 수를 다 합쳐도 이 영화에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예의 허진호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을 영화화한 여러 작품들과 약간 다른 결말 부분에서는 감독의 스타일이 담겨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모두가 깨어진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끝에서 순수한 마음은 지켜지고 순수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물증이 남는다는 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엔딩에서 남겨졌던 '다림의 사진 액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그 한가지를 제외한다면 허진호 감독의 색깔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배우의 연기를 살펴보자. 우선 세 배우 중 가장 도드라지게 보이는 사람은 '미스 모'를 연기한 배우 장백지라 하겠다. 얼핏 <동방불패>의 임청하를 보는 듯한 강렬하면서도 관능적인 눈빛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미스 모'를 잘 표현한다. 앞서 이 캐릭터를 연기했던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 속 글렌 클로즈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속 이미숙의 연기에 비해도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플레이보이 '셰이판'을 연기한 장동건의 경우, 몇 장면은 얼마 전 끝난 <신사의 품격>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래도 타 언어권에서 연기를 하다 보니 경직된 듯한 모습도 보인다. (더빙을 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듣기에는 본인의 육성처럼 느껴졌다.) 굉장히 훌륭한 외모를 장점으로 갖고 있지만 스티븐 프리어스 영화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 존 말코비치의 카리스마에 비할 때는 심심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뚜위펀'을 연기한 순수의 결정체 장쯔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미스 모' 역할을 장쯔이가 했어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워낙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줬던 배우였기에 그렇게 생각됐던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나니 뚜위펀 역할이 적역이었다 싶다. 그러나 감정 표현이 다소 과하다는 인상이 남는다. 순수를 표현할 때도 그렇고 격정을 표현할 때도 그렇고 모두 힘이 너무 들어간 듯한 인상이다. 그런 면에서 <스캔들>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스캔들>이 개봉했을 당시 전도연의 연기가 다소 심심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캐릭터를 위해 많이 누르고 누른 표현이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국판 <위험한 관계>에서 장쯔이의 연기를 보니 캐릭터 표현에 과함이 없었던 전도연의 연기가 훌륭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마음을 갖고 게임을 하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는 18세기에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얻고 깨달음을 주는 뛰어난 원작이기에 어떤 리메이크가 나와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위험한 관계>의 매력인 것 같다. 그러나 중국판 <위험한 관계>는 다시 한 번 원작의 뛰어남을 생각해보게 할 뿐 영화 자체만의 매력으로 각인시키는 뭔가는 부족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