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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루퍼] 시간은 결국 밝은 미래를 지향하며 흐른다

 

 

*가급적 스포일러가 없도록 썼음.

 

루퍼는 킬러다. 타임머신이 존재하지만 타임머신을 사용하는 것이 불법인 세상과 그것을 절묘하게 활용하는 킬러 조직이 영화의 핵심 배경이다. 2044년에 루퍼를 직업으로 사는 조(조셉 고든 레빗)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달하는 '미래로부터 온 타겟'을 죽인다. 미래로부터 온 타겟은 2074(영화 속 현재로부터 30년 미래) 킬러조직의 타겟이고 그 타겟을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인 2044년으로 보내 그 시간대에서 죽인다. 그렇게 살인을 하면 미래에서는 시체가 없으니 살인을 감출 수 있고, 현재에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 영화 속 표현대로 '클린'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전제는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전제가 더 있다. 바로 이 '루퍼'의 계약조건이다. 루퍼로 일하다가 30년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 루퍼는 30년 과거로 보내져 루퍼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타임머신의 사용이 금지된 미래 시점에서 루퍼는 그 범죄사실을 발설할 수 있는 위험 인물이 되고 과거로 보내져 그 곳에서 루퍼인 자기 스스로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일종의 '계약 종료'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조의 표현대로라면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루퍼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 루퍼의 계약 조건, 즉 언젠가는 미래로부터 온 자신을 죽여야 하는 루퍼의 직업적 숙명 앞에 선 인간, 루퍼의 갈등으로부터 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아무리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 해도 눈 앞에 나타난 미래의 자신을 총으로 쏴 죽여야 할 때 마음에 미동이 없는 자가 있으랴. 이는 당연한 인간 심리의 반영으로 관객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영화가 보여줄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영화는 동일인인 현재의 루퍼 조(조셉 고든 레빗)와 미래의 루퍼 조(브루스 윌리스) 사이의 갈등, 쫓고 쫓기는 숙명의 대결에 초점을 두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본 영화는 그것보다 다른 중요한 것을 품고 있다. 애초에 내가 나를 죽여야 하는 것이 인간 심리 상 말이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이든 미래의 나이든 서로를 죽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영화는 영리하게 그 둘이 공통적으로 대적해야만 하는 공공의 적을 찾아낸다. 그것은 킬러 조직이자 미래 킬러 조직의 우두머리인 '레인메이커'이다. 내가 나를 죽일 수 밖에 없게 만든 그 조직의 싹을 제거한다면 그야말로 '클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일테고 그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도 제법 흥미롭다. 그렇다고 현재와 미래의 조, 그 둘이 합동으로 그 대상을 공격하는 1차원적인 설정은 이 영화에는 없다. 여전히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대립 상황이고 그것이 영화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든다.

 

이제 양자의 대결에서 다자의 대결로 확장된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낼 수 있을까.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중 영화가 선택한 결말은 '우리의 시간이 밝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전까지 자신만을 지키려고 들었던 루퍼의 숙명은 영화 내내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 나아가 인간 전체의 삶을 지켜내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으로 흐른다. 이 결말이 다소 느닷없어 보이기도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범죄가 끊이지 않는 데다 알 수 없는 힘이 선과 악의 경계를 오가는 중대한 상황인데 그저 잔인하게 총질을 해대며 자신을 지키려다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결말은 느닷없을지언정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는 소재의 특성상 <매트릭스> <터미테이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루퍼를 쫒는 조직원들의 모습이 '스미스 요원'처럼 보인다거나 상하로 보여질 화면을 좌우로 돌린 연출은 <매트릭스>를 연상하게 하고, 미래에서 온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충돌하는 것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러 조직에 있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대치한다는 설정은 매력적으로 조리할 수 있는 신선한 소재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각각 현재와 미래의 ''를 연기한 조셉 고든 레빗과 브루스 윌리스는 얼핏 전혀 닮아보이지 않았음에도 영화를 보다 보면 영락없는 동일인처럼 느껴진다. 이에는 브루스 윌리스의 영화들을 찾아보고 분장을 겸한 조셉 고든 레빗의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 브루스 윌리스가 조셉 고든 레빗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연기하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이 캐릭터를 위해서는 나은 방법이라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 에밀리 블런트와 파이퍼 페라보의 인상이 너무 비슷해서 약간 헛갈렸다.

* '시드'를 연기한 아역의 연기는 얼핏 호러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