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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 light on the stage

[방울의 은단] 시절 인연의 이해 그리고 성장

 

 

 

<방울의 은단>

한국예술종합학교 2013 가을 예술제 공모 선정작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상자무대2_2013.09.12

 

시절 인연의 이해 그리고 성장

 

갓 중학생이 된 방울은 학교 축제 때 본 선배 현설 좋다.

자신과는 달리 예쁘고 멋진 현설을 동경하며 그녀가 진짜 자신의 언니였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IMF 이후 실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다툼이 잦은 부모님이 계신 집안 환경은 불만일 뿐이다.

 

그런 방울에게 엄마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해준다.

모든 인연은 오고 가는 때가 있다는 의미의 '시절 인연'.

그러면서 엄마와 딸, 가족은 평생 인연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렇다. 살면서 많은 시절 인연을 만난다. 그들과 많은 걸 주고 받고 그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인연이 늘 평생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한때 뜨거웠을지언정 시간과 함께 흘려 보내 지금은 무얼 하며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인연도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시절 인연을 갈망한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평생 시절 인연을 보장하는 가족은 소홀히 하곤 한다.

그렇게 애타게 찾는 기댈 곳이 되어줄 인연이지만 그 가치를 모른 채 다른 인연만 찾곤 한다.

 

시절 인연을 말한 엄마와 엄마의 인연인 아빠는 누구보다도 서로의 관계 속에서 쌓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딸인 방울보다 먼저, 더 많은 인연의 한계를 경험했다.

부모와의 이별, 품었던 아이와의 사별 등.

그런 부모의 눈에 방울의 고민은 슬며시 미소 지을 만한 귀여운 고민이다. 토닥토닥 달래주고 싶은데 자꾸 딴 곳을 바라보고 빠져나가는 딸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방울과 그녀의 동네 친구 천동이 갖는 종말에 대한 불안도 부모에겐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현실의 삶에서도 발등에 떨어진 고민들이 차고 넘치며 삶에 균열을 내고 있는데 지구 종말이란 너무나도 먼, 비현실적인 고민으로 여겨졌던 것이리라.

 

현실적인 고민에 치이는 부모와 슬슬 세상 이치에 눈을 떠가는 아이들의 고민들이 한데 모여 충돌하면서 방울의 가족은 다음 단계를 향해 간다.

그것은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자 성장의 시간이 된다.

처음 본 '낮달'을 신기해 하고 이상하게 따라다니는 이명이 신경 쓰이고

이혼을 앞둔 부모의 불화와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도 '자아성찰'을 논하던 어린 방울과 천동에게도

성장의 시간은 찾아온다.

성장의 시간은 방울의 이명이 사라지고 첫 월경을 경험하는 것으로 흔적을 남긴다.

방울이 '현설 언니'를 바다에 소리쳐 보내고 커밍아웃하는 친구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건 성장의 징표처럼 보인다.

시간이 흘러 추억의 이름이 되어 들춰보긴 하겠지만 시절 인연으로서 인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렇게 우리는 성장한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방울의 은단'은 방울이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할아버지의 흔적처럼 들고 다니며 먹는 은단을 가리킨.

이따금 은단을 먹던 방울은 엄마가 가출한 후 은단을 꺼내 먹다가 마당에 쏟는.

쏟은 은단을 다시 수습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이내 포기해버린다.

그 후 방울이 은단을 꺼내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성장의 시간을 보내고 인연에 대한 '자아성찰'을 겪은 방울에게 이제 은단이라는 대상은 보내도 될 것이 된 것 같다.

마치 어린 아이가 늘 품에 품고 자던 곰 인형을 더 이상 품지 않는 때가 오는데 그것이 성장의 다른 표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방울의 은단> '입체 낭독극'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의자만 놓인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대본을 손에 든 채 마치 트랙 위를 걷듯 등장하고 빠지면서 자신의 역할을 낭독하고 해설가도 무대에 등장한다. 이는 구체적인 무대를 지닌 형식의 연극보다 관객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극 속에서 방울은 자신의 일기를 몰래 읽은 엄마에게 화를 낸다.

'낭독극'이라는 형식 하에 대본을 낭독하는 배우들을 통해 극 속에 등장하는 것처럼 누군가 나의 일기를 (몰래) 낭독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방울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가 남다르지 않은 나와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좀 더 이야기에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형식으로 느껴졌다.

 

작가 이혜빈의 전작인 <지금도 가슴 설렌다>에서처럼 가족의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삶 속에 일상처럼 파고드는 균열과 수시로 스쳐가는 인연들을 이해하고 지나면서 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일상의 섬세한 순간,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시선이 예리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