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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 light on the stage

고인 물 같은 연극_거기, 양철지붕

 

 

고인 물 같은 연극_<거기><양철지붕>

 

특정 지역의 어느 한 공간, 주로 어느 작은 지방의 소박한 공간같이 제한된 영역에서 펼쳐지는 극은 때때로 고인 물처럼 느껴진다. 인물의 과거가 바탕을 이루지만 이야기는 현재 그 공간에 가득한 공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치 고인 물을 보는 듯 하다. 누군가 돌을 던지거나 휘휘 돌리더라도 출렁이거나 휘휘 돌아갈 뿐 결국엔 거기 그대로 고여있는 물처럼 말이다.

 

경기도립극단의 <양철지붕>과 극단 차이무와 이다의 합작 <거기>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고인 물과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그 고인 물은 탁한 막걸리가 되기도 하고 비틀어 따는 ''맥주가 되기도 한다.

 

폭력의 연쇄 <양철지붕> 

의붓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온 자매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양철지붕>. 자매는 흐르고 흘러 파주의 한 노동현장의 함바집(현장식당)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고 있다. 하지만 거친 남성들에 둘러싸인 자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성적 지분거림은 시선으로도 그들을 가둔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서 끊어지지 않고 끈덕지게 자매에게 돌아오는 폭력의 연쇄는 핏빛 복수의 밤이 지나고서도 여전히 그녀들을 떠나지 않는다. 벗어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폭력의 사슬. 양철지붕은 추위나 더위, 빗소리조차도 막아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들에게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다만 녹이 슬 뿐 여전한 그것처럼 그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여전히 거기 <거기>

강원도의 부채 끝처럼 생긴 작은 마을의 작은 카페(또는 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거기>. 마치 매일 그렇게 모이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하나 둘 모인 사람들 사이에 서울에서 이 작은 마을로 흘러 들어온 (이 곳에선 보기 드문) 여인이 나타난다. 곱표가 4(XXXX)나 쳐진 ''맥주(병맥주의 사투리 발음. 대부분의 '' 발음을 '' 또는 ''로 한다. '여고' '예고', '여자' '예자'로 들린다)를 마시며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상스레 마을의 귀신 이야기로 흐른다. 처음부터 보기 드문 젊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허세로 시작한 남자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나누는 귀신 이야기조차 여자에 대한 허세와 수컷들끼리의 견제로 보인다. 그러던 중 꺼내든 여자의 과거 이야기는 이야기의 흐름에 반전을 기한다. 수영장에서 익사한 어린 딸의 상처를 지닌 여자가 죽은 딸아이에게 걸려온 전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은 극장 전부에 숙연한 적막이 흐른다. 남자들의 이야기가 허세와 견제의 그것이었다면 여자의 그것은 그 허세와 견제를 솔직한 마음 열기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렇게 온통 자신들이 경험한 귀신 이야기를 끝으로 취한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로 향한다. 이후 이 다섯이 다시 거기에 모일 지 모르겠으나 거기는 여전히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 날의 대화가 그들을 어떻게 달라지게 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채로 여전할 것이다. 마을의 맏형인 장우는 양철지붕집에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여름에는 쪄 죽을 것 같고 소나기라도 내리면 전쟁이 난 것처럼 시끄럽다는 그 양철지붕. 그러나 그에게 그 양철지붕 집을 떠나거나 보수하려고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과거의 귀신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연인 이야기도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 또는 술 안주일 뿐 그게 현재의 그들을 어떻게 달라지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거기는 여전히 거기일 뿐이다.

 

두 연극은 인물들이 실제로 음식을 먹는 장면이 등장해 인상을 남긴다. <양철지붕>에서는 함바집이 배경인만큼 카스테라와 우유, 막걸리를 실제로 먹고 마신다. 극의 클라이막스에선 막걸리 냄새가 극장 안을 채울 정도가 된다. <거기>에선 모든 배우가 최소 곱표4개짜리 병맥주를 2병씩은 마셔대고 안주로 제공되는 구운 오징어의 냄새가 극장을 채우고 배우들의 얼굴도 슬며시 벌겋게 달아오른다. 실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속에 이야기는 더욱 더 관객에게 현실감을 제공한다.

<거기>의 무대는 객석과의 사이에 단을 제거했다. 배우의 뒷모습까지 보이는 술집 테이블을 두고 단이 없는 무대와 객석 연출은 마치 술집에서 옆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왁자한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 또는 그 테이블에서 같이 술을 마시면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리액션을 하는 친구의 기분으로 관람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