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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박열] 가장 당당하게 저항한 그들을 만나다



박열



가장 당당하게 저항한 그들을 만나다






박열의 시 <개새끼>,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시 




'불령사'의 주축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소환하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일제강점기였던 1922~1926년 무렵을 배경으로 '불령사'라는 항일 아나키스트 단체의 주축이 되었던 의사 박열(이제훈 역)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역)의 뜨겁고 당당했던 저항의 삶을 조명한다.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들, 한마디로 말 안 듣는 조선인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는 '불령선인'에서 따와 단체의 이름을 '불령사'라고 한 것부터 이들의 저항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됐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분위기와 정신을 더욱 북돋았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역시 3.1운동으로부터 더욱 더 뜨거운 항일운동의 의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923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규모 7.9의 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진 일본인들은 정부의 대책에 반감을 갖게 되고 일본 내각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악성 루머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일본 군대, 경찰, 일반인으로 구성된 자경단은 계엄령 선포 3일만에 6천 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십오엔 오십전'을 발음해보라고 하고 어색한 일본어 발음을 하면 여지없이 조선인으로 몰아 잔인하게 학살하는 행태를 영화에서도 보여준다. 이 말도 안 되는 관동대학살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염려한 일본 내각은 또다시 음모를 꾸민다. '조선인에겐 영웅, 일본인에겐 원수로 적당한 놈'을 본보기로 잡아내 조선인 학살의 근거로 포장하고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 타겟으로 '불령사'를 조직하고 활동하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검거하고 천황의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 반입 계획을 꼬투리 삼아 대역죄로 기소하기에 이른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 생활을 하면서 대역재판에 임했던 시간이 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 그들이 얼마나 당당하게 불의에 저항하는지, 그런 타당한 당당함에 쥐새끼 같은 일본 수뇌부가 얼마나 보기 좋게 휘둘리는지를 지켜보는 와중에 통쾌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저항, 감당할 수 있겠어?




이미 <동주>를 통해 우리가 잘 몰랐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보여줬던 이준익 감독은 역시나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펼쳤던 의사 박열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엄혹한 시기에 뜨겁게 타올랐던 저항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이 그러했듯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숭고하다고 할 만 하다.







<동주>의 그들보다 <박열>의 그들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은 저항과 투쟁에 임하는 자세다. 그들은 지치고 슬프고 우울하게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억압하는 자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투쟁한다. 그들의 영리하고 당당한 저항은 일본제국주의에 물든 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식민 통치 시기에 지배의 권력을 지닌 자들을 향해 부당함을 주장하고 올바른 타당함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 그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감탄을 불러내는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목에 들어오는 칼이 가리키는 방향에 추종의 고개를 숙이는 것이 생을 유지하는 길일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그 칼날을 돌려세울 수 있는 당당함은 어느 시대에나 지향해야 할 인간의 모습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선택의 길이 아님을 알기에 이런 당당함으로 저항했던 의사들의 삶에는 저절로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박열>은 보는 내내 감탄과 탄식, 분노와 함께 통쾌한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박열보다 가네코 후미코




2012년 4월 국내 번역 출간된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나쁜 일본인’, ‘억울하지만 선량한 조선인’의 이분법적인 모습으로 영화를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1919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권력과 제도에 휘둘리지 않는 민중의 자유와 부당한 폭압에 저항하는 아나키즘을 토대로 한 항일운동이 본격화됐다고 한다. 정확히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이 담아낸 아나키스트 항일운동의 모습이 이준익 감독이 지금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그 시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이유에서도 영화의 타이틀 롤은 박열이지만 그보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더욱 포커스가 맞춰진 인상을 받았다. 일본인이지만 일본 천황제도에 저항하고 조선인 단체에 속해 항일운동을 펼치는 후미코의 모습은 순간순간 박열을 압도한다박열이 이송되는 순간 '인터네셔널가'를 선창하며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이나 법정에서 시비를 거는 청중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며 당당히 자신의 말을 마무리하는 모습 등은 박열의 카리스마를 압도한다.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으로 옳지 않은 상대를 대하는 범민족적 저항이라는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외신기자들의 취재 모습들(평론가 달시 파켓이 외신 기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본인인 후미코의 저항 운동만큼  이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요소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100% 실화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때문인지 어느 순간 감독의 포커스도 박열이 아닌 가네코 후미코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역할을 야무지게 해낸 배우 최희서에게도 박열을 연기한 이제훈에게보다 더 시선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자서전을 완성하는 모습 등에서도 그녀가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가를 이해하게 하는 단서를 던져준다. 반면 박열의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들어와서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상대적으로 덜 던져준다. 최희서 배우는 <동주>에서도 일본인 쿠미 역할로 등장했지만 <박열>에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투박하지만 힘 있는 컬러, 이준익의 영화 세상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은 기획력이 돋보이는 투박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기획과 제작에서 역량을 발휘했던 영화인이고 흥행 여부를 떠나 눈에 띄는 소재를 발굴해내는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의 감독이고 작품성으로 호평 받았던 <사도><동주>의 감독이며 꾸준히 영화팬들에게 언급되는 <라디오 스타><황산벌>의 감독이지만 그의 연출이나 구성(편집)이 기획만큼이나 세련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제와 캐릭터의 힘이 이끄는 부분이 많고 연출은 투박하고 단조롭게 보이는 것이 이준익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장단을 떠나 그것은 이준익 감독 영화의 색깔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열> 역시 그런 이준익 감독의 색깔이 나타나는 작품으로 봤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실존인물이 갖는 힘, 일제강점기 배경이 지금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의 힘이 영화의 세련된 만듦새보다 더 앞에 나가 있는 모습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단조로운 호흡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의미 있는 메시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인물을 스크린으로 소환한 힘이 관객과 잘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