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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장수상회]누군가 나를 위하여, 그렇게 내 곁에서



장수상회


누군가 나를 위하여, 그렇게 내 곁에서

 

 

아마도 50년은 더 됐을 과거, 사방이 논밭이었던 서울의 수유동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김성칠은 좋아하는 여학생을 졸졸 따라 걷다가 들꽃을 넘겨받는다. 풋풋한 프롤로그가 지나면 이어 웃음기 없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문을 열고 나오는 노년의 김성칠(박근형)이 등장한다. 사방이 논밭이었던 그 때에 비하자면 사방이 모두 개발되고 번화해진 것 같은 시대이건만 사람들은 재개발에 눈독을 들인다. 유일하게 재개발 승낙을 하지 않는 김성칠 노인 때문에 재개발 계획은 진전이 없고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설득하기 위해 미인계를 동원하기로 한다. 김성칠 노인의 이웃으로 이사온 임금님(윤여정)과의 만남을 통해 굳게 닫힌 김성칠의 마음을 열게 하고 재개발 계획에 동의하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임금님과의 만남으로 김성칠의 나날은 새봄의 꽃처럼 조금씩 피어나는 듯 하다. 그러나 성칠의 금님을 향한 마음이 점점 커질수록 이 계획의 실체가 드러나며 감춰뒀던 아픔과 상처도 모습을 드러낸다.

 



 

<장수상회>는 노년의 주인공을 내세운 멜로드라마이자 가족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이고 노년이 처한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재개발 진행을 위해 마을 사람들과 김성칠 노인이 티격태격 밀당을 벌이고 임금님과 만남을 설계하는 초반 설정은 빠르고 경쾌한 호흡으로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중반 이후 계획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고 결국 눈물폭탄을 터뜨린다. 영화의 분위기에 변화를 주는 중반 이후부터 영화는 뚜렷한 장단점을 드러낸다.





김성칠 노인 설득 계획의 실체를 감췄다가 드러내는 플롯은 일종의 반전을 관객에게 제시하려는 의도였을 텐데 이 플롯을 곱씹어 보면 결국 초반 에피소드들이 결국 반전을 위한 작위적인 플롯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감정 신과 눈물폭탄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려는 본질적인 감동이라고 할 때 재개발 논쟁과 그로 인한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재개발 논쟁이 결국 쉽게 해결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물론 영화이긴 하지만) 그 모든 소동이 그저 관객의 눈을 가리기 위한 설정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임금님이 김성칠의 집에서 김성칠의 글을 발견하는 대목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후 10여분간의 호흡이 심하게 늘어지는 것도 단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수상회>가 관객에게 주려는 본질적인 감동이 사랑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묶일 수 있다고 할 때 분명한 장점을 지닌다.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랑의 약속까지 잊혀지게 만드는 노년의 심신은 애잔함을 느끼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겠다는 의지는 마음을 울린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내 곁에 있는 모습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장수상회>에는 서로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이 담겨있고 그것은 관객의 마음에 작은 조약돌을 던진다. 그 작은 조약돌은 관객 개개인의 가족에 대한 생각,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파장을 일으키고 결국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김장수 역할을 한 배우 조진웅은 이 작품을 하고 나서 가족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보게 됐다고 했다.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가족의 얼굴을 모처럼 찬찬히 바라보니 세월의 흔적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묻어있어 마음이 짠했다고 한다. 조진웅 배우가 느꼈던 그 감정을 영화를 본 관객들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살짝 자극을 주지만 결국 관객 개개인의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어쩌면 영화와 별개로 감정이 폭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영화가 주는 감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이 영화를 <국제시장>의 정서와 비슷하다고 한다. 고집스런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수상회>는 최소한 고집스런 주인공 노인을 혼자 골방에서 울게 하지는 않는다. 그의 주변인들을 노인의 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를 위해 곁에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계획을 마련하는 따뜻한 사람들로 등장시키고, 의지와는 달리 말을 안 들어버리는 노년의 심신마저도 토닥거리는 따뜻한 정서가 흐른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국제시장>보다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이나 <노트북>같은 헐리웃 영화와 더 비슷한 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이 웨이>의 실패 이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단편 <민우씨 오는 날>을 만들고 <장수상회>로 돌아온 강제규 감독은 1,000만이 볼 수 있는 대작 영화를 만들었던 때의 무게감을 빼고 다시금 <은행나무 침대> <쉬리>를 만들었을 때처럼 관객의 감정에 조약돌을 던지는 영화 쪽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그가 다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작품을 만들게 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금 강력한 이야기꾼으로서 면모를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장수상회>는 박근형, 윤여정 같이 멋지고 노련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노년의 배우가 있다는 뿌듯함을 감동으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강하고 억센 모습으로 등장했던 전작들과 달리 부드럽고 포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윤여정 배우와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스크린을 꽉 채울 때나 멀찌감치 떨어져 뒷모습을 비출 때나 한결같이 김성칠이라는 캐릭터를 느끼게 하는 명연기를 보여주는 박근형 배우의 연기는 배우로서 이들이 장수할 수 밖에 없는 힘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