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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남긴 피로감

름이니까 아이스커피~’가 아니라 ‘여름이니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영화 사이트를 통해 1년 전부터 개봉일을 확정 발표하고 개봉 몇 달 전부터 프로모션을 해대는 통에 늘 기대감으로 개봉날을 계산하고, 개봉일을 앞두고서는 화면 좋고 사운드 좋은 극장의 명당자리를 콕 집어 예매하고 기다리게 하는 것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다.

나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참 좋아한다. 올해 역시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시작으로 예년보다 이른 4월 초부터 블록버스터들의 질주가 시작됐다.

여름의 포문을 여는 블록버스터의 개봉은 시장을 선점하려는 틈새전략과 맞물려 점점 시작되는 시점이 빨라지는 듯하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으로 5월도 이르다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4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여튼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필두로 예매율 올킬을 달성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바로 뒤이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5월을 축제로 만들 액션 블록버스터들임에는 틀림없다.

역시 큰 기대감으로 여름 영화 축제를 즐길 마음의 준비를 한 나이지만 놀랍게도 ‘분노의 질주 더 세븐’과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면서 재미와 감동의 만족감보다는 일종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던 이 피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누가 누가 더 파괴하나?’

‘분노의 질주 더 세븐’과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고나서 한마디로 두 영화를 묶어 표현하자면 딱 저 표현이 나온다. 명목은 두 영화 모두 확실하다. 분노한 무리들은 그들의 삶을 지켜내고 의리를 위해 ‘미션 임파서블’ 뺨치는 전략을 내세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때리고 부순다. 지구는 물론이요 전 우주적 확장하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등장인물들의 수만큼이나 때려 부수는 액션의 양이 울트라 짱 먹을 정도이다.

그러하니 분명 액션을 즐기는 쾌감을 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게 너무 지나치다. 한마디로 완급조절을 못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관객이 숨 쉴 틈은 허락해야 감정도 감동도 생기는 것일 텐데 두 영화 모두 작정이라도 한 듯 이 완급조절을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액션블록버스터에 환장하는 나도 두 영화를 볼 때는 통제되지 못하고 연속으로 쏟아지는 액션시퀀스에 감동의 탄성 대신 질림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영웅 없는 현실, 우리는 어떻게 싸워햐하는가?

완급조절 못하는 모든 것에 과잉인 두 영화를 보고나오면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고스란히 우리 사는 현실이 만들어내는 피로감으로 연결됐다.

현실의 문제 앞에 우리가 싸워나가는 방법과 영화 속 히어로들이 싸우는 방법의 차이, 영화 속 싸움을 목격하는 관객인 나와 영화 밖 현실의 싸움을 목격하는 시민인 나의 차이가 느껴지면서 그나마 남았던 간접 체험의 짜릿함마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란 현실의 반영이자 허구이니까 현실에서 목마른 부분을 제한 없이 창작해내고 보여줄 수 있다. 현실과 다르다거나 과하다고 해서 문제 삼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두 액션 블록버스터를 보고 나오면서 현실엔 이런 영웅이 없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드는 2015년이다 보니 영화가 줄 수 있었던 감동마저도 빼앗긴 기분이 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막 욕이 나오려고 하지만 차마 글로 옮기지는 않겠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 아직도 제대로 된 원인규명이 되지 않았다. 1년이 지났지만 돌아오는 건 켑사이신 공격뿐이었다. 현실이 주는 막막함과 피로감이다.

성완종 파문을 두고 ‘곱게 죽지 죽을 때 뭘 끄적거려서 세상을 발칵 뒤집느냐.’고 반응하는 사람과 세월호를 두고 ‘타이타닉호 때는 세월호 저리가라급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받을 만큼 받았으면 됐지 뭘 더 얻으려고 저 난리냐’고 말하는 어르신들과 젊은 댓글무리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어쩌면 현실에 절실하게 필요한 게 어벤져스 군단과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들일 텐데 그들을 불러 모으고 영화처럼 깨고 부순다고 한들 뭐가 제대로 해결이 될까. 최소한의 공용어와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서로 통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상식이 없어 보이는 권력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 네 편 내 편의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의 구현이 아닐까 싶지만 우리네 권력자들은 정의보다는 의리에 더욱 치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히어로들도 개인적 고뇌가 있다. 정의의 판단이 주는 딜레마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히어로들이 열심히 싸워서 대충 정리가 된 듯해도 속편, 삼편 시리즈로 나와야 하니 영화 속 악의 세력은 또다시 기지개를 켠다. 그렇다 해도 영화에선 최소한 권선징악의 메시지는 남는다. 그러나 세상은 권선징악마저 콧방귀 뀌며 보내려한다.

상식과 정의, 소통이라는 그 간절한 것이 현실에 없으니 영화라는 픽션, 판타지 안에서 만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좋으나 결국 2시간의 대리만족 후 나와서 당장 모바일 폰으로 배달되는 속보만 봐도 세상과 영화의 괴리가 명확해지는 요즘이니 백일몽처럼 느껴지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연속이 피로감으로 느껴지는 슬픈 현실이다.

_2015.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