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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결혼하는 여자] 삶의 주체로서 선택, 인간으로서 미덕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 40회로 종영됐다.

 

한 번은 시어머니의 모진 타박이 원인이 되어, 다른 한 번은 남편의 바람질로 두 번 이혼하게 된 오은수(이지아)를 중심에 두고 결혼과 사랑, 이혼과 재혼, 가족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드라마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라는 제목에서부터 결혼과 이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 분명했고 또 그러했지만 그런 표면적인 소재나 화두를 통해 본질적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삶의 주체로서 선택을 하는 나와 그 선택을 대하는 가족, 친구 등 주변인들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삶의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선택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의무, 그 선택을 함에 있어 나와 가족 등 공존하는 사람들을 고려하는 예의를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가족이든 친구이든 그 선택을 지켜보고 대하는 상대로서 적절한 태도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삶은 어떻게 해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 해도 가만두지 않는다. 이는 사주니 팔자니 갖다 붙이지 않아도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무엇도 정해진 답이 있을 수 없고 그 누구도 빈틈없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답이란 것도 달라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런 인간이 하는 선택과 결정, 그것으로 빚어지는 일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고도 현명한 것일까. 어떤 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모습을 지키는 방법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였다.

 

80년대 말부터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꾸준히 보아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가치, 지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는 것 같다.

이혼을 두 번 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고 갓 출산한 아이를 빼앗기듯 넘겨줘야만 했던 오은수의 모습 뿐만 아니라 은수의 남편이었던 태원과 준구, 15년 짝사랑을 간직해온 현수,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왔던 광모, 파혼의 시련을 이겨내며 자연스레 제 짝을 만나게 되는 주하, 결혼한 옛 연인에게서도 마음을 거두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다미,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로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게 된 채린, 이혼하고 재혼한 부모 사이에서 자라야 하는 슬기, 소박하지만 행복한 은수의 부모, 욕심을 소화시키지 못해 화를 꺼이꺼이 내고야 마는 태원 모친, 재벌가의 품위를 지켜내려는 교양이 입혀진 준구의 가족 등 모든 캐릭터를 통해 선택과 결정, 책임과 의무,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채우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중반쯤 은수가 임신한 채로 두 번째 이혼을 결심했을 때, 그렇다면 준구-다미의 바람질이 준 스트레스 때문에 유산을 하게 되고, 태원도 슬기와 트러블을 일으킨 채린과 이혼 후 은수와 재결합을 하면서 제목에서처럼 은수가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되는 모양인가 짐작했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70대인 작가의 감각에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의 구태한 생각이었고 드라마를 만만하게 본 오만이었다. 드라마의 끝 오은수는 제목대로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재결합도 신결합도 아닌 스스로와의 결혼이었다. 나를 세우지 않고, 나를 이해하지 않고 누군가와 어찌 결합을 하리요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생각해보게 됐던 것을 6가지로 정리해봤다.

 

1. 교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정하라

살다가 아니다 싶은 게 생기면 굳이 참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잘못 방향을 잡은 것이 있다면 하루라도 먼저 바로잡고 가는 게 맞다. 그것이 돌아가는 길이거나 거세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길이라도 교정할 것은 교정해야 한다.

오은수가 남편의 바람질을 참지 못하고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하는 것을 두고 들리는 말들 중에는 이런 말이 보통이다. '여자들 중 그런 거 한 두 번 겪지 않는 여자 없다, 참고 넘어가면 좋을 것을. 너는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걸 박차고 나가려 드느냐.' 어쩌면 이것이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조언일 수 있다. 가뜩이나 이 이혼으로 인해 앞으로 누릴 수 있을 부와 명예, 자식까지 놓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현명한 타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그런 조언을 따르는 선택도 가능하다. 하지만 은수는 '저는 아닙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로 답한다. 그게 오은수다. 그렇다면 오은수의 선택도 가능하다며 수용해야 한다. 더 말릴 것이 아니라, 설득할 것이 아니라 보살피고 응원해야 한다. 결국 이런 은수의 선택을 보고 준구의 모친도 "그런 결정을 하고 나가는 게 한편으로는 참 싱그럽다고 해야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걸쳐야 할 옷이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 안다. 선택, 방향이 잘못된 것 같아 바로잡으려는 선택을 말리지 말라.

 

 

2. 자신의 삶을 살라

이혼을 두 번 하든, 재혼을 세 번 하든, 동거를 하든, 독신으로 살든 자신의 삶을 살게 내버려 두라. 남의 리듬에 춤 출 필요는 없다. 결혼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한 편의 인내와 희생, 배려로 유지되는 세상도 아니다. 특히나 그 희생의 무게가 아내, 어머니, 여자라는 이름 위에 걸쳐지는 세상은 구태다. 거칠 것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라.

 

 

3. 결혼 서약의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다양한 인간의 선택, 취향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혼 서약이 갖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변치 말아야 한다. 반려자를 사랑하고 또 평생 사랑하겠다는 다짐, 신뢰, 신의, 배려는 지켜져야 한다. 한 번의 바람질 참아주는 것도 사랑이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로 합의 하에 다양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게 아닌, 한 편에 상처를 주고 배신감을 주는 것은 함께 손잡고 다짐한 결혼의 약속을 어기는 행위다. 지키기로 한 것은,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한다.

 

 

4. 가정 폭력의 끔찍한 영향력

은수와 이혼 후, 태원은 모친의 성화로 마지못해 중매로 만난 채린과 결혼한다. 그러나 채린은 전처인 은수의 딸인 슬기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만다. 채린의 폭력과 폭언으로 난리가 나고 태원은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철없는 채린의 행동은 미움 받기에 제격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극의 후반, 채린의 트라우마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행했던 오래된 가정 폭력에 의한 것임이 드러난다. 가정 폭력의 공포를 갖고 사는 채린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가정 폭력이 갖고 있는 힘의 논리를 그대로 슬기에게 퍼붓게 되고 그것이 그녀를 병들게 해버렸다. 채린에게 슬기는 가정 폭력이 만든 상처를 해소해야 하는 분출구와 같았다. 그녀 말대로 유산 문제로 태도가 돌변한 시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그녀에겐 약자인 슬기에게 분출된 것이다.

겉으로 볼 때 부유한 집에 아쉬울 것 없는 그녀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 분명히 가해질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했던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만든 슬기와 같은 또 다른 피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극 초반 채린은 태원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얌전한 척 하지만 은근히 태원 모친과 은수의 관계를 이용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은수는 상처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태원과 슬기, 태원 모친마저도 정신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채린이 성장하면서 학교와 사회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 행동들이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을 것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만큼 가정 폭력은 1차적인 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 피해자가 가하는 행동들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들을 낳기 마련이다. 가정 폭력은 무시무시한 파급력을 지닌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사회의 병이다.

 

 

5. 미덕, 사람 위에 사람 없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에 이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부와 명예의 차이를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일을 해주는 사람들(드라마에서는 '사용인'으로 표현한다)을 대하는 태도로 그것이 드러난다. 재벌 저택인 준구의 집 사용인과 오랫동안 태원의 집안일을 돌보며 가족의 일원처럼 살고 있는 임실댁의 모습을 보면서 사용인에 대한 예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기사가 운전 실수를 한 것을 두고 무안할 정도로 훈계하는 준구를 보면서 은수가 쏘아붙이는 장면이 있었다. 어릴 적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가 훨씬 나이 어린 고용자에게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팠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건 예의이자 인격의 문제라고 하는 장면이다. 사용인을 대하면서도 하대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는 모습, 일을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지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것 아니라는 태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는 인상적인 표현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런 표현이다. '점심에 중국집에 자장면 불러 먹었어요'. 보통 '자장면 시켜먹었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불러 먹었다'는 표현을 나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처음 들었다. 전화로 주문을 하고 '불러서 먹는다'가 어쩌면 당연한 표현인데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시켜서 먹었다'고 했으니 그런 말이 품었던 태도, 의식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시켜 먹었다''불러 먹었다'라는 표현에 차이를 두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드라마 속에 함께 사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것이 드러나는 인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6. 세상을 일깨우는 가치 있는 사람

선한 사람, 예의와 도리를 아는 사람, 배려하는 사람, 신의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주체적이고 당당한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일깨우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도 이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메인 캐릭터인 은수와 태원은 이런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애초 은수와 태원이 이혼을 하지 않고 슬기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각자 다른 사람들을 품으면서 살아간다면 그런 가치를 확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태원은 채린이 슬기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혼까지 결심한다. 하지만 가정 폭력으로 인한 채린의 상처를 알게 된 후 그녀를 포용한다. 문제의 원인이 그 사람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감싸고 보살피며 함께 이겨내는 방향을 선택한 태원은 채린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가치를 확산한 것이다. 은수의 경우 스스로 겪는 고통과 상처가 분명하겠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과 선택을 묵묵히 지켜내며 살아간다. 바람질을 참지 않고 이혼하겠다는 그녀의 태도는 역시 바람질을 견디며 살아왔던 준구의 모친에게도 싱그러운 영향을 끼친다. 여자로서, 아내로서, 어미로서 이런 삶의 태도, 이런 선택도 가능하겠구나, 어쩌면 이게 더 옳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으로 은수의 선택은 가치를 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세가 은수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인, 그녀의 딸인 슬기에게도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태원이 채린과 잘 살아보겠노라는 얘기를 들려주려 찾아온 날, 은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들러 예쁜 꽃이 핀 선인장을 사 들고 들어와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시가 돋친 선인장은 마치 품지 못할 만큼 상처가 커 그것이 밖으로까지 삐져나온 모양 같다. 하지만 그런 선인장에 예쁜 꽃이 피었다. 자신도 상처가 많고 그것이 겉으로 삐져나올 수도 있지만 견디고 살아내며 그렇게 꽃을 피워보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소리 내 고통을 말하지 않고, 소리 내 울지 못하는 은수를 보면서 그녀의 아픔과 그녀의 인내의 힘이 동시에 느껴졌고 그런 강인한 내면의 다스림을 통해 그녀의 삶에 꽃이 피어나리라는 믿음, 희망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