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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Snowpiercer

궤도를 이탈해 열어야 하는 문을 여는 게 진정한 혁명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환경은 모조리 파괴되고 인류는 멸망한다. 요새 역할을 하게 된 '설국열차'에 탑승한 사람들만이 마지막 생존자로 남은 상황. 그렇게 '설국열차'가 궤도를 달리기 시작한 지 17년이 지났다. 열차의 꼬리칸에 탑승한 사람들의 삶은 누추하다. 음식부터 환경까지 모든 것을 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그의 수하 메이슨(틸다 스윈튼)에 의해 통제 받는다. 이에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벌을 받는다. 열차 운행 18년째가 되는 새해를 앞두고 꼬리칸에 탑승한 사람들은 혁명을 준비한다. 감옥에 갇힌 열차의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의 도움이라면 엔진과 윌포드가 있는 맨 앞칸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꼬리칸을 이끄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그의 멘토인 길리엄(존 허트) 그리고 에드가(제이미 벨)와 타냐(옥타비아 스펜서)를 필두로 혁명은 시작된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의 헐리웃 진출작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블록버스터급은 아니지만 4,000만 달러(450억 원)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였고 국내외 배우들과 스태프의 참여로 큰 관심을 끌었다. 완성된 영화는 변함없이 봉준호 감독의 아우라를 풍긴다. 감독의 의도대로 철저하게 통제되고 조율된 '아트'로 느껴진다. 흩뿌려지듯 하나씩 등장하는 퍼즐 조각들이 종국에 하나로 모여들면서 커다란 그림을 보여주고, 그 완성된 그림까지 보고 났을 때 앞서 보았던 퍼즐 조각들의 의미까지 곱씹게 되는 예술이자 예의 봉준호 영화답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에 걸맞게 철저히 계획된 톤을 유지하는데 타협은 없어 보인다. 그저 흘려 보냈던 장면이나 소재들이 후에 엄청난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의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관객은 충격을 받게 된다. 환각제 역할을 하는 '크로놀'을 계속 요청했던 꿍꿍이나 '스테이크 맛'에 대한 언급이 왜 나왔는지 영화의 말미에 알게 되는 순간은 퍼즐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처럼 계속 곱씹고 싶게 만든다.

 

 

폐허가 된 지구, 열차는 지구를 대체할 수 있는가

 

<설국열차>는 베일에 싸인 작품이었다. 트레일러가 공개되는 순간에도 기차의 꼬리칸을 주요하게 비췄을 뿐 기차의 앞칸, 특히 윌포트와 엔진이 있는 맨 앞칸에 대해서는 어떤 이미지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이유는 분명히 있겠다. 꼬리칸에서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펼쳐지는 각 칸의 풍경들이 '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돌진하는 이들(과 관객)에게 가하는 충격이 매번 의미를 달리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윌포드와 엔진이 있는 맨 앞칸은 각 칸을 거치면서 흩뿌려졌던 퍼즐 조각이 한데 모여 큰 그림이 완성되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그 모든 것에 처음으로 맞닥뜨려야만 그 효과는 극대화 되는 것이다.

꼬리칸을 제외한 나머지 객실의 설정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사는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풍스런 유럽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오거나 수족관을 옮겨온 듯한 객실, 나이트 클럽과 사우나, 미용실 그리고 난잡한 집단 성교가 이뤄지는 객실 등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씩 끼워 넣은 모양새다. 환경이 망가져 세상의 끝을 경험한 꼬리칸 사람들은 그 후 18년 동안 남아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보로 라이트'같은 요소들을 한 칸 한 칸 전진하면서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발견들이 혁명을 일으켜 꼬리칸을 해방시키려는 이들에게 설국열차가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꼬리칸에만 있었을 땐 기차를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요새 같은 공간으로서 인식했다면 지구 멸망 전의 생활 양식이 여전히 가능한 앞 칸들의 모습을 봤을 땐 기차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희망, 지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겐 또 다른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만 이는 어떻게든 기차(엔진)를 유지하려는 절대권력자 윌포드의 의지에 동조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하니 과연 혁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점점 궁금하게 만든다.

 

 

하나의 소재, 다각적으로 활용되며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팔의 역할'은 심상치 않다. 인체의 팔이라는 부분은 <설국열차> 안에서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신발을 던지는 도구로, 권력자가 통치를 위해 엄벌하는 대상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도구로, 기차의 엔진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부품으로 그리고 조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단과 구원을 위한 희생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하나의 소재에 다양한 의미부여가 가능한 것은 '혁명'이라는 소재도 마찬가지다. 혁명은 꼬리칸에 있는 사람들 각자와 맨 앞칸에 있는 절대권력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혁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앞칸으로 가려고 하는가. 혁명세력의 대장인 커티스는 불평등한 상황을 벗어나 꼬리칸에 자유를 얻기 위해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꼬리칸에서 경험한 '대혼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방어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그의 멘토인 길리엄은 자신의 팔, 다리를 걸면서까지 조직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고 혁명의 조언자 역할을 한다. 타냐(옥타비아 스펜서)와 앤드류(이완 브램너)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 대열에 오른다. 남궁민수와 요나는 문을 열기 위해서 대열에 참여한다. 그들 각자 혁명에 참여하는 이유는 있으나 그것이 하나로 통일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도 애써 그 이유를 통일시키려는 의지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결국 기차의 맨 앞칸에 가서 윌포드를 대면했을 때 커티스는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윌포드의 이야기를 듣는다. 돌진했던 혁명 대장의 의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른해 보이는 혁명의 이유

 

꼬리칸의 불평등함을 해소하기 위해 일으키는 혁명이지만 이상하게 영화에는 그런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뭉쳐지는 계기나 혁명을 준비하며 의지를 모으는 모습들을 생략하거나 굉장히 사소하게 다룬다. 윌포드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꼬리칸 사람들에게 행하는 악행도 생각보다는 약하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렇게 일으킨 혁명에 상대방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저 정도로 열릴 문이었다면 그 동안 (이 혁명을 포함하여) 겨우 세 번 밖에 혁명이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서 혁명에는 타이밍이 중요했음이 드러난다. 커티스가 대장으로서 준비가 됐을 타이밍, 길리엄과 에드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타이밍, 결정적으로 열차 설계자인 남궁민수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타이밍이 중요했던 것이다.

 

혁명의 이유와 타이밍이 명확해지는 순간 혁명은 일어났다. 그러나 기차의 맨 앞칸을 목적지로 둔 혁명의 여정은 생각보다 나른하다. 액션 시퀀스가 기대보다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표현 방식은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열차를 세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과정을 지나 혁명의 배후가 드러나면서 이해하게 된다. 열리기를 기다렸던 문이 하나씩 열리는 과정이 보기에 화려할 리가 없잖은가.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는 칸과 칸 사이 문을 하나씩 열어줄 때마다 코르놀이라는 환각제를 두 개씩 달라고 요청한다. 문이 열릴 때마다 주어지는 환각제가 기능하는 것처럼 혁명세력이 앞 칸으로 갈 때마다 환각과 세뇌 또한 강해진다. 메이슨(틸다 스윈튼)이 말했던 '네 자리는 꼬리칸이다. 자리를 지켜라'라는 말도 결국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서서히 윌포드의 논리에 순응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타이밍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혁명을 기다렸던 세력에게도 타이밍은 중요했던 것이다.

<설국열차> 속 혁명의 과정, 속성이 이러하니 여기에 들어맞는 액션 연출이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 시퀀스나 <베를린>의 화려한 액션 시퀀스 같았다면 보는 맛은 있었을지라도 영화 속에서 정말 중요한 '혁명'의 성격을 나타내기에는 부적절했을 것이다.   

 

 

설국열차는 왜 달리는가

 

설국열차는 지구 곳곳을 공전하듯 돈다. 새로운 해를 맞는 순간도 열차가 어느 지역의 특정 다리를 지날 무렵을 기준으로 삼을 만큼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운행된다. 열차는 애초에 목적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황폐해지고 얼어붙은 지구에 살아남기 위한 요새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곳에 머물러 있어도 요새 구실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은 윌포드가 엔진을 지키려는 의지와도 통할 듯 하다. 그렇게 계속 달려야만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고 열차 안 삶이라도 동력을 지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력을 제공해주는 윌포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 것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윌포드는 체제 유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차가 멈춰 한 곳에 정차해 있다고 가정해보라. 사람들은 그것을 요새가 아닌 감옥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달리는 것과 달리지 않는 것의 차이는 그렇게 크다. 하지만 설국열차가 달리는 목적이 그야말로 윌포드의 체제 유지를 위한 방편이라면 그건 진정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허무한 달림처럼 보인다.

 

 

열리기를 기다리는 문, 열어야만 하는 문

 

커티스는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 차례 증명됐듯이 바깥은 동사할 정도로 춥다고 믿으며 기차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 자체도 윌포드에 의해 세뇌된 믿음일 수 있다. 똑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달리는 열차의 차창 밖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환호만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바깥에 노출된 상태에 대한 공포, 위협은 그들이 먹었던 (넓은 의미의) 음식처럼 그들 스스로를 통제하고 체제 안에서 저항 없이 살도록 만들었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열차 안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을지언정 정작 진짜 그 체제를 벗어난 삶에는 두려움을 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무지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어느새 무시무시하게 그들이 세뇌 당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것이 혁명의 방향이어야 한다. 권력자가 만들어놓은 문, 그들이 밀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문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열리기를 두려워하는 진짜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누군가에 의해 세팅된 구조 안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까지 세뇌되어 열어야 할 문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어디에선가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설산을 거니는 백곰의 시선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그렇기에 희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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