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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세상의 끝까지 21일] 아날로그 감성을 품에 안고 착한 사람들이 떠나는 마지막 여정

 

세상의 끝까지 21일

아날로그 감성을 품에 안고 착한 사람들이 떠나는 마지막 여정

 

 

소행성 '마틸다'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이를 파괴하기 위해 발사한 우주선은 파괴된다. '마틸다'와 지구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됐고 21일 후에 세상은 끝을 맞게 된다. 시작은 마치 지구 최후의 순간을 그리는 SF 영화 같지만 이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설정일 뿐이다. <세상의 끝까지 21(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은 세상의 끝을 목전에 두고 지나간 사랑의 자취를 찾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담긴 소위 '착한 감성'의 영화다. 그리고 그런 여정을 이끄는 방식이나 도구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뿜어낸다. 손편지나 LP, 턴 테이블, 오래된 졸업 앨범과 낡은 하모니카 그리고 클래식 음악 FM 등 아날로그적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를 적절히 활용한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결국 추억을 반추하고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후회와 미련을 곱씹으면서도 아름답게 마무리 짓기를 원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할 파트너를 찾아 미결감 없는 '행복'한 엔딩을 맞고자 한다.

 

 

막상 세상의 끝이 예고되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진다. 각자 어딘가로 탈출하듯 떠나기도 하지만 했던 일들을 기계적이고 무기력하게 반복하기도 한다. 이 안에서도 사람들은 지구 대재앙 이후의 보험 혜택을 위해 값비싼 보험을 문의하기도 하고 술과 대마, 섹스로 가득한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도지(스티브 카렐)의 집안 일을 도와주는 헬퍼 엘사(토니타 카스트로)는 이 와중에도 빠짐없이 일을 하러 오고 오히려 이젠 오지 않아도 된다는 도지의 말에 실망하기도 한다. 곧 끝날 세상인데도 TV쇼와 스포츠 중계는 계속되고 최후의 순간을 카운트다운 하는 뉴스도 쉬지 않는다. 잡지는 인류애를 상징하는 인물로 예수와 오프라 윈프리를 커버로 내세우기도 한다. 세상의 끝이 예고된 직후의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이 꽤 현실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으론 2012년 지구 종말론의 가능성을 거의 반쯤은 열어뒀던 본인도 그 날로부터 8개월이 지난 지금 너무나도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되니 멋쩍기도 했다.

 

 

그런 혼란이 1주일 정도 지나자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끝의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 폭동으로부터 함께 도망치면서 시작된 도지(스티브 카렐)와 페니(키이라 나이틀리)의 여정은 각자의 지난 사랑과 가족을 찾는 여정이 된다. 이웃에 살면서도 한 번 마주칠 기회도 없었던 도지와 페니는 행성의 지구 충돌 21일 전, 즉 세상의 끝을 알리는 알람이 맞춰진 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도지는 고등학교 때 첫사랑인 올리비아의 지난 편지를 발견하고 아직 미련이 남은 옛사랑의 흔적을 찾아간다.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페니는 도지의 도움을 받아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 여정에서 페니는 자신의 지난 사랑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둘은 다양하게 세상의 끝을 맞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며 그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추억한다. 배신감과 고통을 줬던 상대도 있었으나 이 순간 그런 사람들을 미워할 시간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 연인과 가족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움, 미안함, 애정을 천천히 표현해가며 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런 그들의 여정을 함께 감상하면서 관객은 머릿속으로 '나라면 세상의 끝 21일 전에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루를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고 잠자리에 들 때 미련이나 후회가 남지 않고 흐뭇하게 웃으며 잠들었던 날처럼 세상의 마지막도 그렇게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물론 이런 생각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이 이끈 결과다. 

그들은 굉장히 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종말을 앞두고 순하고 착한 엔딩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감상을 배가하는 요소는 스티브 카렐이라는 순둥이 아저씨 캐릭터의 힘과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소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음악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순하게 받아들일 것 같은 '스티브 카렐'의 캐릭터는 종말을 앞두고 있을 수 있는 불안과 혼란을 모두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재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을 엔딩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 또한 차분하게 정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강조 요소다. 이들이 차를 탈 때마다 즐겨 찾는 클래식 FM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LP 매니아인 페니가 여정 내내 들고 다니는 LP와 그 안에 담긴 노래들은 인간이 가진 서정성과 감수성의 미를 극대화 한다. 영화의 시작에 아내와 헤어지는 순간 도지의 차 안에서 흐르는 클래식 FM은 지구와 행성의 충돌을 예고하며 장난스럽게도 THE BEACH BOYS 'WOULDN'T IT BE NICE'를 들려준다. LP 마니아인 페니의 추억과 도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HERB ALPERT AND THE TIJUANA BRASS의 'THIS GUY'S IN LOVE WITH YOU'가 흐른다. 음악이 영화의 무드를 이끌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역시 음악이 강조됐던 영화 <500일의 섬머> <브루클린 브라더스>의 음악을 담당했던 롭 시몬센(Rob Simonsen)의 손길이 이 영화에도 담겼기 때문이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착하게 아날로그적인 감상을 품에 안고 차분하게 세상의 끝을 향해 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하루하루의 삶과 세상이 끝나는 순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