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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마지막 4중주] 계속되는 삶이라는 악장 속에서도 반드시 찾아야 할 조화와 쉼의 의미

 

 

마지막 4중주

계속되는 삶이라는 악장 속에서도

반드시 찾아야 할 조화와 쉼의 의미  

 

 

결성 25주년을 맞은 현악 4중주단 '푸가(fugue)'. 오늘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연습 중에 첼리스트 피터(크리스토프 월켄)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 파킨슨병 초기 판정을 받게 된 피터는 '푸가'에 새로운 첼리스트를 영입하여 팀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팀의 스승이자 멘토인 피터가 떠나야 할 위기와 함께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푸가' 구성원들에게도 문제와 갈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푸가' 4중주는 변함없이 연주될 수 있을까.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 악장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

 

'푸가' 쿼텟은 '베토벤 현악4중주 14'을 연습한다. 총 연주시간이 40여분에 달하는 이 작품은 각 장의 끝마다 '쉼 없이 계속 연주할 것'을 표기한 베토벤의 의도에 따라 불협화음이나 실수가 발생해도 멈춤 없이 연주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동시에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형식을 지닌 '푸가형식' 1악장부터 등장하니 연주자 개인의 개성과 팀의 조화가 모두 중요한 작품이리라. 1바이올린이 시작을 하면 이어 제2바이올린이 5도 낮게 응답하고 이어서 비올라와 첼로가 가세하며 연주를 진행하는 1장을 연습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도 그 어떤 파트도 기울거나 빠지지 않는 조화가 중시되는 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이런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연습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 작품은 쉼 없이 계속되며 구성원들의 조화가 중요한 삶과도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이 필요한 인생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쉼 없이 계속 달릴 수는 없다. 악보의 표기와는 달리 어떤 삶에도 '쉼 없이 계속'이라는 명령을 부여할 수는 없다. 쉼을 통해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현재에 반드시 부여해야 한다.

피터의 위기를 시작으로 '푸가' 구성원들 사이에는 갈등과 문제가 터져 나온다. 2바이올리니스트인 로버트(필립 시무어 호프만)는 이 기회에 제1바이올리니스트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은 욕망을 끄집어낸다. 1바이올리니스트(마크 이바니어)는 과거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을 팀의 조화를 깬다는 이유로 놓치고 싶지는 않다. 비올리스트 줄리엣(케서린 키너)은 스승이자 멘토인 피터의 부재가 다가오는 것을 불안해하고 투어 공연으로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처받은 딸의 원망을 들어야 한다. 서로 스승과 제자, 친구, 옛 연인, 부부로서 관계를 유지하며 25년을 조율해온 그들에게 그 모든 과거는 일순간 상처뿐인 현재를 들이댄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를 청산한 새로운 시작이 해답이 아닐까 싶은 혼란에 빠진다.

함께 한 시간이 25년이나 됐는데 그간 갈등이나 분쟁 하나 없다가 25년 만에 느닷없이 이 모든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일까? 그 이전에도 이들 사이에는 작거나 크게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현재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터지는 것일 텐데, 시간의 흐름에 해결을 의지하게 되는 삶은 실제로는 미결된 문제까지도 흘러가는 시간에 실어 보내버리곤 한다. 시간의 흐름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망각일 뿐이다. 그리고 망각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들이닥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멈춤, 쉼이 필요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잠시 멈춰 문제를 짚어내고 대책을 마련하고 가야 한다. 쉼 없이 계속 흘려 보내는 것, 달리 말해 망각은 해결이 아니다.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베토벤 현악 4중주 14'을 연주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피터가 보여주는 모습(결단) '쉼 없이 계속'이라는 악장의 표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잠시 쉬며 재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해도 삶은 계속되고 조화는 이뤄진다고 말이다.

 

 

삐걱거리지 않을 수 없는 삶이기에 더욱 가치 있는 칭찬과 격려

 

피터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와의 일화를 들려주는 장면은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사실 이 일화는 러시아의 첼리스트인 그레고리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 파블로 카잘스를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형편없는 자신의 연주를 칭찬한 카잘스의 가식에 분노했었음을 시간이 지나 카잘스에게 이야기했다는 그 일화에서 카잘스의 응답이 인상적이다. 카잘스는 당시 연주를 정확히 기억해 다시 연주하면서 '당신이 이 부분에선 이렇게 연주했고 그 점이 매우 훌륭했기에 나는 칭찬했었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단점을 찾아 비판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고, 나는 장점, 잘 된 점들을 보고 칭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카잘스와의 일화는 제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으로부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삶이라는 것도 참 그렇다. 매 순간 완벽하게 해나가고 싶지만 매 순간 실수 없는 경우가 없고 만족스러운 경우도 없다. 타인과 갈등 없이 흐르는 순간도 없고 어떤 행복의 순간도 지속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서 삶을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그 실수의 순간을 꼬집으며 비꼬며 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웃게 만드는 순간, 잘했던 순간, 서로 조화로웠던 순간들을 상기하고 즐기며 삶은 유지되는 것이다.

 

 

<마지막 4중주>는 개인의 욕망보다 팀의 조화와 유지를 중시하는 가치를 담고 있고, 진부한 애정관계나 여전히 여성에게만 육아의 책임을 묻는 설정 등이 보수적이고 고루하게 보이며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계속되는 삶이 삐걱거리는 순간 우리가 대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깊은 통찰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뻔하게 펼쳐진 설정과는 달리 뻔하게 풀리는 결말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가치일지언정 진리임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현자의 호흡이 느껴지는 삶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