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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아버지와 아들, 숙명과도 같은 대물림의 비극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아버지와 아들, 숙명과도 같은 대물림의 비극

 

 

<블루 발렌타인>의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의 최신작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The place beyond the pines)>는 뉴욕의 스커넥터디라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2대에 걸친 (그러나 그것이 시작도 아니었고 역시나 끝도 아닐) 비극을 담아낸다. 동시에 자본과 권력이 그 비극의 대물림을 부추기는 현실을 담아낸다.

감독은 자신의 삶에 둘째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후, 게으르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저 그런 자신의 삶이나 성향이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는 건 아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 끝에 이 영화를 착안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로서 갖게 되는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와 대물림에 대한 불안한 심상이 영화에 꼼꼼하게 담겨있다. 오프닝 크레딧에 사람들의 성()을 이름과 구별하여 볼드체로 표기한 것도 혈족간, 특히 아버지의 삶이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긍정적으로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자 삶의 방식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역할모델 또는 영웅이다. 그런 긍정적 역할이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의 삶은 아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테야'라며 뛰쳐나간 아들이 결국 아버지와 같은 삶의 고리 안에 갇혀버린 이야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자신을 억압하는 아비에 반감을 갖고 저항할지언정 자신 안에 꿈틀대는 그 아비의 본성을 발견하며 어느새 자신이 저항했던 아비에 대한 이해와 강한 측은함을 느끼는 사례도 익숙하다. 그만큼 부자지간의 끈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강한 책임감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며 그것을 위해 헌신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부성애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강한 부성애 역시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모두 수반한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강한 부성애는 때때로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에서 그 부작용은 대를 잇는 비극을 양산하기도 한다. 권력을 지닌 아비의 강한 부성애는 비뚤어져 나가는 아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더욱 날뛰게도 하고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아비의 비극은 자식의 삶에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그렇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그에 따른 선택과 결과가 낳은 비극의 연속을 보여준다. 아들의 삶을 책임져주고 싶었던 아비는 은행강도로 돌변한다. 아버지의 소망과는 달리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아들은 어느덧 아버지의 소망보다 더 나아간 정치인으로 돌변한다. 잘못된 아비의 선택과 그것이 만든 비극은 약물에 빠진 아들의 삶을 만든다. 자식의 부정을 자신의 권력으로 막아준 아비는 결국 그런 삶의 방식을 아들에게 전수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부정과 비극의 정보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어 결국 들통이 나고 그것은 다시 비극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런 관계 안에서 어머니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들은 아버지의 선택을 만류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무지했거나 무책임했던 부성에 대해 책임을 묻지도 않고 오히려 거리 두기를 제안한다.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 남편이 그 일을 그만둘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인 아버지는 그런 여성인 어머니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어쩌면 모성은 본능적으로 끊임없는 대물림의 비극을 막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부성은 그걸 수용하지 않는다. 숙명의 굴레는 그렇게 부자를 옭아맨다.

 

 

영화는 시작부터 구형의 레일 안으로 들어간 세 명의 오토바이 스턴트맨들이 묘기를 부리는 것을 비춘다.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강한 스피드로 구 안을 교차하듯 휘젓는 세 남자의 모습은 세상 속 세 아버지의 모습으로 읽힌다. 무서운 엔진소리를 내며 구형의 틀을 회전하는 오토바이 묘기는 위태로워 보인다. 세 스턴트맨들은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며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사고 없이 쇼를 마무리할 수 있다. 그 중 누구 하나라도 돌출행동을 할 때 관객을 환호하게 했던 스피드는 죽음을 불러오는 충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도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나의 사소한 실수는 비극의 시초가 되어 끝도 모를 비극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오토바이에 헬멧을 썼기에 모두 비슷해 보이는 스턴트맨들처럼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아비들, 남자들은 모두 비슷한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경쟁관계에 있지만 조화로움에서 벗어나는 순간, 피해는 도미노처럼 확산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갖지 못한 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영화 속 두 아버지인 루크(라이언 고슬링)와 에이버리(브래들리 쿠퍼)의 상황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둘 다 한 살짜리 아들을 갖고 있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런 아버지를 대립시키는 설정은 꽤 드라마틱하다. 스스로와 너무 닮은 상대에게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총구를 들이댈 수 밖에 없는 슬픈 현실이 (과장일지 몰라도)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조화롭게 돌아야만 살아남고 환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는 구조물 속 오토바이 스턴트맨들처럼 위태로운 부조리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 흐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 아무것도 없는 아비는 아들을 위해 은행강도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없는 아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변명할 기회도 없이 그 본의에 대한 이해도 구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는다. 그 아버지의 비극은 아들의 삶에 대물림 된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을 지닌 아버지는 세상이 알아서 영웅으로 만들어준다. 아들의 부정에 따끔한 주의를 주지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활용한다. 아비의 경고에 잠시 기가 죽었던 아들은 이내 아비의 자본과 권력으로 주어지는 보호막의 맛을 알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방식에 적용한다.

은행강도 짓으로 아비가 구한 돈은 권력자에 의해 돌고 돌아 다시 아들의 손에 들어오지만 그것으로 권력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얻는다. 결국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손대지 않고 코를 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코 풀지도 않은 손에 콧물을 묻혀야만 하는 부조리한 삶의 연쇄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현실을 담아낸다. 놀랍게도 힘 하나 주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라는 국내 개봉 제목이 원제를 발음대로 고스란히 옮긴 매우 무성의한 번역 제목의 예라는 아쉬움 섞인 불만이 있다. 센스를 발휘한 번역 제목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원제)에도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The place beyond the pines'는 영화의 주요 배경이었던 지역인 '스커넥터디(Schenectady)'의 영어식 풀이 명이라고 한다. 즉 모호크 인디언들의 언어로 '스커넥터디'가 영어로 풀자면 '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라는 것이다. 이건 그러니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갱스터즈 인 뉴욕>이나 <밀양> 처럼 특정 지명()이 영화의 제목이 된 셈이다. 이런 지명을 제목으로 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수 있겠다. 이 의미를 영화의 내용과 연결 지어 추측해보자면 부자관계의 시작이 있었고 그 모든 비극과 연쇄의 배경이 된 곳, 그리고 어쩌면 그런 연쇄가 끊이지 않을 곳으로서의 예로 특정지역의 이름을 지정한 것에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들이 태어났던 곳, 떠돌이였던 아버지가 아들을 책임지고 싶다는 마음에 정착하고 싶었던 곳,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살고 싶어진 아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하게 되는 곳, 서로 닮은 두 아비가 서로 총구를 겨눠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영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스커넥터디'를 표현한 것으로서 제목인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