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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퍼시픽 림] 오타쿠의 땀내로 범벅이 된 거대한 비주얼에 압도되다

 

퍼시픽 림 Pacific Rim

오타쿠의 땀내로 범벅이 된 거대한 비주얼에 압도되다

 

동아시아 인근 태평양 연안 심해에 균열이 일어나고 그 틈에서 정체 불명의 괴수들이 나타나 지구를 공격한다. '카이쥬'라 불리는 이 괴수들은 인류를 초토화시켜 지구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계략으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이에 속수무책이었던 인간은 초대형 로봇 '예거'(독일어로 헌터를 의미)를 제작하여 카이쥬에 대적하고 승리의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승리의 환희는 잠시뿐, 더욱 강력한 카이쥬 세력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예거 프로젝트를 정비하여 다시 카이쥬와의 전면 대결을 준비한다.

 

 

 

지구를 공략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는 세력과 인간의 싸움으로는 올 여름 마지막 선수가 될 (것 같은) <퍼시픽 림>은 그 크기에서 다른 모든 영화들을 압도한다. <맨 오브 스틸>처럼 온갖 건물들을 (피하지 않고) 거침없이 부숴버리는 액션이지만 크기 면에서 훨씬 압도적이다. 일본 메카물과 괴수물에 상당한 마니아로 알려진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스케일의 끝을 보여주려는 기세로 관객을 압도하며 항복하게 만든다. 볼거리에 있어서 불만을 제기하기 어렵다.

영화 시작 10초도 안되어서 괴수의 실체를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는 그 스케일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카물과 괴수물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는 싶었으나 유사하게 참고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던 델 토로 감독은 카이쥬 디자인에 있어서도 디자이너에게 유사한 작품들을 일체 보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낼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유사 장르의 영화들을 참고하기 보다는 고야의 '콜로서스 The Colossus' 같은 그림들을 참고해서 이미지를 그려냈다고 한다. 그 결과 총 40여 개의 카이쥬 디자인이 나왔고 영화 속에는 이 중 9개가 사용됐다고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콜로서스(The Colossus)]

 

 

예거 디자인에 있어서도 미국의 크라이슬러 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형체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특히 예거와 카이쥬의 각각의 대결마다 파도 물결의 디자인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 일본의 아티스트인 호쿠사이의 'The Great Wave off Kanagawa' 속 파도 그림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80미터가 넘는 높이로 바다에 떨어뜨려도 수심이 허리 정도까지만 차는 이 거대한 로봇과 괴수의 대결은 묵직함과 날렵함을 동시에 선보인다.

카이쥬에 대적하는 예거 안에서 뇌 신경을 연결하여 조종하는 예거 파일럿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짜릿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손과 발을 움찔거리며 스스로 예거 파일럿이 된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호쿠사이  [The Great Wave off Kanagawa]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캐릭터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깨방정 연구원 뉴튼 박사(찰리 데이)와 허먼 박사(번 고먼), 카이쥬의 장기매매업자로 등장하는 한니발 차우(론 펄먼). 자신의 연구 세계에 폭 빠진, 그야말로 오타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깨방정에 가까운 수다를 떠는 만화 캐릭터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연구원들은 카이쥬의 뇌와 자신의 뇌를 연결하면서 결정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유명한 장군의 이름과 브룩클린에 있는 유명 중국 레스토랑의 이름을 따왔다는 '한니발 차우'를 연기한 배우 론 펄먼은 낯이 익다. TV시리즈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역할로 유명세를 탄 그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인 <헬 보이><블레이드2> 등에 모습을 드러냈었기에 <퍼시픽 림>에서의 등장도 반가운 인물이다. 감독의 총애를 받는 배우인만큼 그냥 사라지지 않는 캐릭터이니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끝까지 보려면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조금 더 객석을 지킬 필요가 있다.

 

 

 

메카물과 괴수물의 오타쿠와 키덜트족을 완전히 매료시킬 이 프로젝트는 그만큼 테스토스테론이 풍기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남성 오타쿠가 풍기는 땀내로 범벅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객석에서도 오타쿠의 땀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영화가 다루는 감정 또한 남성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영화는 한 예거에 들어가야 할 예거 파일럿의 파트너십을 강조한다. 둘의 뇌가 연결되는 일명 '드리프팅'을 통해 온전히 교감할 때 하나의 예거 안에서 파일럿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니 각자의 트라우마, 공포 등 모든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밀접한 공유를 하게 되는 파트너십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일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함께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고 결국 모두 죽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그렇게 파트너십, 둘의 감정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배경을 갖지만 모든 감정은 남성적인 것으로 흐른다. 부자, 형제, 동료간의 뭉클하게 오가는 감정은 기본이고 아버지와 딸, 남성 마스터와 여성 제자 등 여성이 포함된 관계에서도 부성애 같은 것이 존재할 뿐 모성애 같은 여성의 감정은 영화 속에 찾아보기 어렵다. 예거 중 주인공 격인 '집시 데인저'의 예거파일럿으로 서로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함께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주인공 롤리 베켓(찰리 헌냄)과 마코 모리(키쿠치 린코)의 관계도 그런 파트너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끝까지 포옹 이상의 스킨십을 보여주지 않는다.

 

 

 

죽은 카이쥬의 장기에서 튀어나오는 새끼 카이쥬를 묘사한 장면도 여성성과는 거리를 둔다. 새끼 카이쥬는 본능적으로 살겠다며 가까스로 죽은 모체 밖으로 튀어나오지만 탯줄에 목이 감겨 스스로 죽고 만다. 모체를 통한 생명체의 탄생마저도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듯한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여성성이 철저히 배척된 것처럼 느껴진다. <에이리언>시리즈에서 괴물을 잉태하면서도 모성에 대한 고민이 잠시라도 스쳤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남성적인 감정들로 채워진 것이 단점이 될 수는 없으나 그 영향 때문인지 영화 속에서의 감정은 조금 삭막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함께 하는 것의 의미와 파트너십, 대를 위한 희생 등 여러 요소에서 감동을 이끌 수 있음에도 관객의 마음을 크게 동하게 만드는 장면은 없어 보인다. 카이쥬와 대결하다가 상해를 입은 동료의 모습을 보면서 짓는 표정이 마치 '저렇게 밖에 못하나' 하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비칠 정도였다는 것은 연기 연출에서든 감정신의 연출에서든 효과적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