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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21세기에 다시 만난 브로드캐스트 뉴스


여기 일이 인생에 전부인 여자가 있다. 소개팅을 하면서도 자기 일 얘기만 하고 전화는 끊이지 않아 소개팅 상대가 고개를 절로 흔들게 만든다. 그녀는 뉴욕 뉴저지 방송국의 아침 정보 프로그램 PD 베키(레이첼 맥아담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승진도 아닌 해고통보를 받았다. 가뜩이나 기운 빠진 그녀에게 어머니조차도 이젠 되지도 않는 꿈은 접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할 정도다. 하지만 그녀에게 방송국 PD로서 언젠가 NBC <투데이 쇼>로 진출하겠다는 꿈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죽기살기로 여러 방송국에 이력서를 보낸 결과 힘겹게 네트워크 방송사인 IBS의 아침 프로그램 데이브레이크총괄PD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그녀.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메이저 네트워크 아침 프로그램 중 꼴찌 시청률(당연히 1위는 투데이 쇼’)에 허덕이고 팀원들은 의욕도 떨어져 보이고 아이디어도 그렇고 여러모로 타 방송사에 밀린다. 첫날부터 메인 남성 앵커를 해고하고, 새로 뽑은 왕년의 명 기자이자 앵커인 마이크(헤리슨 포드)는 고집을 꺾지 않고 여성 앵커 콜린(다이앤 키튼)과 티격태격하는 통에 그 사이에서 통제하는 것도 힘들다. 시작부터 삐걱대던 중에 상사는 시청률이 바닥을 치고 있어 6주 후에 프로그램을 폐지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동료PD 아담(패트릭 윌슨)을 만나 이제서야 데이트 좀 하나 싶지만 워커홀릭인 그녀에겐 사랑도 쉽지가 않다. 이대로 자신의 커리어를 접을 수는 없는 베키, 그녀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굿모닝 에브리원(Morning Glory)> 21세기 현재의 방송가의 모습을 아주 현실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뉴스와 생활정보를 제공하는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그 치열한 방송사간의 경쟁이 한 사람의 커리어를 어떻게 좌지우지 하는지 피 말리는 현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 그 고난의 시간도 보여준다. 잠도 못 자고 일에 파묻혀 살아야 하고 개인 시간, 심지어 연애할 시간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방송사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순간들은 사실 많이 알려져 있어 신선할 것이 있을까 싶다만 언제나 그 일촉즉발의 생방송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는 매력이 있다. 아침을 여는 프로그램이지만 정작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잠들어있는 아주 이른 새벽부터 준비를 해야만 방송이 가능한 프로그램, 그 아침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방송인들의 숨막히는 아침 풍경은 <노팅 힐>의 감독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시나리오 작가에 <미션 임파서블3><로스트>의 제작자의 솜씨로 그려졌다. 매 시퀀스의 에피소드를 어떻게 재미나게 이끌어낼 지를 잘 아는 이 사람들을 통해 분명한 재미가 관객에게 전달된다. 주인공은 물론 PD역할의 레이첼 맥아담스이지만 그녀를 뒷받침하며 팽팽하게 앙숙 연기를 펼치는 해리슨 포드와 다이앤 키튼의 연기는 영화를 더욱 알차게 만든다. 그 둘이 벌이는 티격태격, 기 싸움과 고집스러운 모습은 생방송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한다.

 

영화는 관객들이 장르 영화의 뻔한 결말에 지루해할 것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클리셰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걸 너무 안일하게 써먹지는 않는다. 전문직 종사자의 위기탈출 이야기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대로 영화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초반부터 캐릭터에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했기에 그 결말이 설득력 없이 그저 해피엔딩을 위한 자동문으로 보여지지 않게 한다. 기자로서 사명을 지키겠다는 고집을 부리며 단어 하나하나에도 까다로웠던 마이크, 일에 파묻혀 애인의 집에서도 한밤중에 뉴스 채널을 틀어놓고 방송 소재를 찾았던 베키의 캐릭터가 든든한 초석이었기에 예상했던 결말이었지만 그 과정이 억지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화학 조미료를 잔뜩 넣은 인공미가 아니라 천연재료로 깔끔하게 맛을 낸 음식과도 같달 수 있겠다.

 

영화 속에서 방송국 PD가 주인공이고 방송가 이야기를 다뤘던 것이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 돌이켜 볼 때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1987년작 <브로드캐스트 뉴스>. 홀리 헌터가 방송국 PD역할을 했고, 윌리엄 허트와 앨버트 브룩스가 경쟁 기자이자 홀리 헌터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였다. 그 영화 속 홀리 헌터는 <굿모닝 에브리원>의 레이첼 맥아담스보다 한 술 더 떠 정말 찔러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정하고, 어릴 적부터 완벽주의자에 잘난 척이 몸에 벤 캐릭터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뉴스 보도국 사람들의 일과 사랑을 보여주면서 결국 뉴스 보도의 핵심인 사실의 전달과 진정성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 그것을 영화 속 관계와 연결시켰던 작품이다. 작품과 연기, 모두 완성도가 뛰어나 당시 아카데미상에도 많은 부문 후보 지명됐던 작품이었다. 엄밀하게는 뉴스 보도국과 아침 정보 프로그램 제작팀이라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굿모닝 에브리원>을 보면서 과거의 <브로드캐스트 뉴스>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는 이유가 그런 점에 있다. 그러나 두 영화는 방송의 본질과 진정성이라는 메시지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 탓인 것 같다. 지금의 시청자는 그야말로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에 노출이 된 사람들이고, 시청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시청률을 위해 정말 못할 짓이 무엇일까 싶을 정도로 브라운관 속에는 별천지가 펼쳐진다. 때문에 사실 전달자로서의 방송의 진실성에 대해서 초점을 맞췄던 1987년작 <브로드캐스트 뉴스>에 비해 2010년작 <굿모닝 에브리원>은 살짝 유연해진 자세를 보인다. 당장 시청률을 올려야 하는 베키는 소위 막장분위기로 방송의 톤을 바꿔버린다. 차츰 시청률은 상승하지만 핵심이 빠져있다고 느끼는 순간, 마이크(헤리슨 포드)가 터뜨린 특종보도 덕에 정점을 찍고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마이크의 특종은 그야말로 사실 보도, 부정 부패의 고발이라는 뉴스 보도의 핵심을 지킨 일이었다. 이런 설정을 통해 방송이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청률을 위해 막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던 베키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그 결정을 비난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1987년에서 2010년으로 오는 사이, 시대 흐름에 의한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쁜 워커홀릭 베키에게도 사랑은 있다. 같은 방송사에서 일하는 PD 아담은 영화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주변의 캐릭터이긴 하지만 베키에게는 꼭 필요한 인물이다. 그 캐릭터의 비중을 딱 이 정도로만 조절한 것도, 그리고 그 사이에 갈등을 넣지 않고 모든 걸 다 이해해주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영화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 더 나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 훈남 PD 아담이 마이크를 보고 세상에서 3번째로 악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키가 그럼 앞에 두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그가 대답한다. ‘김정일과 신데렐라 계모라고. 아담이 김정일을 발음하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