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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위대한 개츠비] 남자가 사랑할 때_당신의 사랑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남자가 사랑할 때

당신의 사랑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적 베스트셀러 <위대한 개츠비>가 바즈 루어만의 감각으로 채색되어 스크린으로 찾아왔다. <댄싱 히어로><로미오와 줄리엣><물랑 루즈><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음악과 춤을 조화롭게 녹여내 화려한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기대가 되는 작품이었다. 예상대로 영상은 화려했고 Jay-Z.가 프로듀싱한 음악들은 감각을 스크린에 뚝뚝 흘릴 정도로 탁월하게 영화에 녹아있었다. 하지만 파티 장면 등이 예전 <물랑 루즈>를 봤을 때만큼 짜릿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유는 <위대한 개츠비>는 뮤지컬이 아니기 때문인 듯 하다. <물랑 루즈>에서처럼 계산된 군무가 주는 쾌감이나 인물들의 감정이 노래로 전달되며 감동을 주는 것을 기대한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굳이 바즈 루어만의 전작과 비교하자면 <위대한 개츠비> <로미오와 줄리엣>과 가장 유사한 성격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화려한 파티를 중심으로 한 화려한 볼거리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개츠비라는 인물을 생각해보면 얼핏 로미오가 떠오른다. 그런 생각을 더욱 자연스럽게 이끄는 것은 두 인물을 모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중심은 과거의 연인인 데이지(캐리 멀리건)를 다시 차지하기 위한 순정을 지닌 남자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개츠비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남자들의 사랑 방식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부제를 붙여도 어울렸을 법하게 말이다.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매일 초호화 파티를 벌이고 그녀의 지인들을 섭외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개츠비. 하지만 그의 본심은 그가 벌이는 파티처럼 전략적이거나 계략적이지 않다. 그가 초호화 저택에서 뉴욕 최고의 파티를 벌이는 것은 오로지 데이지가 기대한다고 여기는, 데이지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움을 주는 남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히려 데이지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저택을 소개해주는 순간부터 더 이상의 파티는 없다. 그건 즉, 그에게 파티는 수단이었을 뿐 그는 그 파티만큼 화려하거나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밤마다 데이지의 저택에서 반짝이던 '그린 라이트'를 바라봤던 것처럼 데이지와의 만남은 개츠비에겐 도달해야 할 목적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개츠비는 파티처럼 화려한 사람이 아닐 뿐더러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파티를 벌이고 자신을 알려서 데이지에게 적합한 남자,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남자로 자신을 준비했지만 막상 그녀가 손에 잡힐 거리에 놓이자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모든 행동이 서툴거나 과하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러니 일을 그르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개츠비의 사랑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굳이 데이지를 탓할 것도 없는 것은 그의 사랑의 방식에 먼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렇게 적으면서도 데이지를 곱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만...) 개츠비는 데이지를 향해 순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그것은 상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골인 지점을 목전에 둔 선수에게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개츠비는 바로 눈 앞에 놓인 데이지를 너무 쉽게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에 빠졌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모두 반짝이는 '그린 라이트'에 집중하는 방식인데 이 또한 개츠비의 사랑을 도달해야 할 목적지 또는 앞으로 전진해야 할 대상으로 비추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과거의 추억에 휩싸여 자신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 달리기만 한 맹목적인 사랑의 주인공이었다.

개츠비의 모습은 바즈 루어만의 전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로 등장했던 과거 디카프리오의 모습이 덧입혀진 것처럼 보인다.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서로 떨어져서 살다가 줄리엣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임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시 다가가려는 로미오의 이야기로 꾸며졌다면 그것은 또 다른 개츠비의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봤다. 그런 순정이 로미오의 눈빛과 개츠비의 눈빛 모두에서 반짝이고 그 모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배우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개츠비가 총에 맞는 순간 전화벨은 울렸고 그는 그 전화가 분명히 데이지의 전화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최후의 순간 그의 표정에 절망과 함께 안도와 희망의 표정이 슬쩍 비쳤다고 느꼈다면 그가 그 전화벨 소리를 통해 데이지의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서도 개츠비의 사랑은 무척이나 주관적인 이해에 의한 사랑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하긴 세상의 그 어떤 사랑이 이 주관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런 개츠비의 사랑을 지고지순하고 순정한 사랑이라고 여기며 그의 삶과 사랑에 '위대한'이라는 수식까지 붙이는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 그는 개츠비의 분신이며 이야기의 화자 또는 작가로 보인다. 모든 상황을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닉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혹시 개츠비라는 인물의 행동을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는 함정이 제거된다. 이 모든 사랑의 활동이 개츠비의 입을 통해 직접 전달됐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관객이든 독자이든 개츠비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어쩌면 잘난척하는 뺀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닉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만 결과적으로 닉은 개츠비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개츠비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닉은 개츠비보다 더 정직과 순정의 편에 선 사람이다. 개츠비가 데이지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사업적인 부정 등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면 닉은 부나 명예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츠비의 부탁을 들어주고 끝까지 그의 편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사단을 통과하며 닉은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지기까지 하는데 그만큼 그의 방식도 개츠비의 사랑과 유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좀 더 상상해보면 닉은 이후 결혼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개츠비를 통해 주관적이고 목적성을 지닌 것일지언정 순정했던 사랑이 박살 나는 것을 지켜본 그가 그 부패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틈새에서 자신이 순정할 대상을 찾지는 못했으리라. 어쩌면 닉의 사랑은 개츠비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데이지의 남편인 톰(조엘 에저튼)의 사랑은 전형적인 마초 남성의 사랑이자 이기적인 사랑이다. 교육으로 주입된 여성에 대한 매너는 알지만 톰은 개츠비나 닉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다. 당당하게 외도도 하지만 자신의 아내는 빼앗길 수 없다는 전형적인 남성의 욕심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면서 경쟁 상대인 개츠비를 주저 앉히기 위해 잔인한 계략을 짜는 타락한 인물이다.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 이용할 줄 아는 이기적인 사랑의 소유자이다.

 

톰과 외도하는 머틀(아일라 피셔)의 남편 조지(제이슨 클락). 그는 부와 명성 그 모든 것에서 하층 계급에 속한 남자이자 눈치도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 사랑은 자신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아내가 죽자 마치 자신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복수의 총을 발사한다.

 

개츠비와 닉이 마치 분신처럼 닮은 캐릭터라면 데이지-톰 부부와 머틀-조지 부부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캐릭터다. 두 부부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꽤 닮아있다. 데이지와 머틀은 모두 유부녀인 상태이지만 현재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난다. 남편을 버리고 현재의 사랑을 향해 달려가던 길에서 죽음을 맞게 된 머틀의 모습은 데이지에겐 어떤 경고로서 작용한다. 머틀처럼 데이지가 현재의 사랑인 개츠비를 따라 나섰을 때 앞날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란 암시 같은 것이 흐른다. 머틀은 어쨌든 데이지에 의해 죽게 되는데 머틀의 행동이 데이지의 것이었을 수 있음은 이 죽음이 사랑에 진취적인 여성의 결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겠다.

톰과 조지 역시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꽤 닮아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분노하는 두 남성의 심리는 똑같이 집착을 만들어낸다. 톰에 의해 조지 역시 개츠비를 적으로 여기게 되고 톰의 계략에 의해 개츠비를 저격하고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개츠비를 저격한 조지의 분노는 애초에 톰의 것이었겠지만 사회적 약자인 조지는 톰에 의해 조종된다.

같은 상황에 처한 부부지만 그 모든 비극적 결말은 사회적 약자인 조지-머틀 부부가 맞고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톰-데이지 부부는 아무 탈 없이 유유히 떠난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인 머틀은 더 강렬한 사랑을 따르지 못하고 그로 인한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조지는 재력가에 의해 휘둘리며 역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성별과 계급에 의한 차별과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억압도 엿볼 수 있는 설정이랄 수 있겠다.

 

 

개츠비와 닉, 톰과 조지. 이 네 남자의 사랑 방식을 들여다보며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들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데이지는 소심했거나 비겁했거나 이기적인 까닭에 떠나갔고 머틀은 진취적이었기에 죽음으로 마감됐다. 1920년대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공존하는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의 사랑의 소통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랑이 생존해낼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의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그린 라이트'가 꺼지지 않고 반짝일 수 있을까. 표류하는 심상으로 나의 사랑의 좌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