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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셰임] 그 남자 브랜든과 그 여자 씨씨의 사정, 그 속에서 나를 보다

             <셰임>의 일본판 포스터_영화의 감상을 잘 드러내는 포스터라고 생각하여 본 이미지로 등록

 

 

셰임(Shame)

그 남자 브랜든과 그 여자 씨씨의 사정, 그 속에서 나를 보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셰임(Shame)>은 각자 중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다. 둘은 다른 종류의 중독에 빠져있지만 영화 속 설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공통의 성장 환경이나 생활 방식 등을 바라보면 거울을 통해 둘로 보여지는 한 인물처럼 닮아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니 심리학에 대해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느낀 것이 곧 이 영화의 감상이 되어버렸다.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종류의 중독에 빠진 상태라면 당연히 그것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 된다. 그것을 들켰을 때 예상되는 비난과 조롱이 두렵다. 그것은 수치심을 극대화시킬 것이고 자신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비난과 조롱, 그로 인해 느끼게 될 수치심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겉을 더욱 완벽하게 꾸미고 철저하게 위장한다. 그 위장은 타인을 향한 힐난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자신과 매우 닮아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약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타인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관계 맺기에서 연이은 실패를 맛보며 그것에 더욱 더 절실하게 매달린다. 이해와 위로를 해줄 대상이 간절하다. 그 대상이 자신과 매우 닮아있다고 여긴다면 더욱 편하게 의지하게 된다. 

 

브랜든(마이클 패스벤더)은 섹스 중독으로 보인다. 각종 음란물이 집안 곳곳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고 그의 하드디스크에는 음란동영상과 음란채팅의 상대가 대기 중이다. 사무실에서도 수시로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고 콜걸과의 섹스를 즐긴다. 이는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중독이고 들켰을 때 수치심을 갖게 할만한 중독이다. 중독을 멈출 수 없는 그는 수치심을 느끼게 할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방어벽을 쌓는 방법을 택한다.  

브랜든의 여동생 씨씨(캐리 멀리건)는 자존감이 약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사랑을 구걸하다시피 갈구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하니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늘 사랑에 실패하고 떠돈다 

 

 

섹스 중독에 빠져 수치심에 대한 강한 방어력을 지닌 브랜든과 자존감이 약해 관계 의존 중독에 빠진 씨씨는 모두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 반응에 민감한 인물이다.

브랜든은 자신의 중독을 들키면 안되기 때문에 경계심이 강하다. 혹시 나를 염탐하고 응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조심스럽다. 집에 들이닥친 동생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킨 후 '너는 나를 염탐하려고 왔느냐'고 분노하는 장면에서 그런 그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두려움은 관계 맺기에 장애를 만든다. 겨우 마음을 열고 만난 직장 동료와의 대화를 보면 그가 관계 맺기에서 오는 실패를 두려워함을 알 수 있다. 그 두려움은 그의 가정 불화나 불우했던 환경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한다. 여동생이 집으로 찾아오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은 영화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씨씨가 클럽에서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을 부를 때 브랜든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저지(Jersey) 출신의 이 남매가 뉴욕에서 생활하고 만나기까지 어떤 마음의 짐이나 상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와중에도 부모의 그림자조차도 비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저지에서의 성장 환경이 이들에게 상처로 남아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   

어쩌면 같은 성장환경의 아픔을 공유한 동생을 보면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를 부정하고 싶어서 더욱 매몰차게 대하는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상사인 데이빗과 원나잇스탠드를 한 씨씨에게 '너는 가망성이 없다'는 비난을 퍼붓는 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회사 컴퓨터에 담긴 음란물을 들킨 후 자존심이 상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 변명이나 저항을 하지 못한다. 평소 굉장히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어쨌거나 데이빗은 브랜든의 상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더럽다고 말하는 데이빗에게 '유부남인 주제에 원나잇스탠드 하고 돌아다니면서 그게 할 소리냐'고 따지지 못한다. 오히려 이 화를 동생 씨씨에게 쏟아낸다. 이를 통해 브랜든이 사회에서 맺는 관계란 껍데기만 갖춘 형식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비단 브랜든만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가까스로 얻은 지위를 지켜내기 위해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위장하는 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고독해지고 쓸쓸해지는 삶은 우리의 몫이기도 한데 결국 본질은 혼자 지내는 자신의 공간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브랜든에게 의미 있는 공간은 자신의 집, 사무실, 화장실 등 매우 사적인 영역이다. 영화의 오프닝에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집안을 활보하는 모습은 그 공간이 브랜든에게 갖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한다. 그만큼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고 들키고 싶지 않은 욕구를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동생 씨씨가 찾아오고 하나하나 감췄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무너지는 것은 그가 견고하게 쌓았던 수치심에 대한 방어의 벽이다.

 

 

뉴욕에 정착한 브랜든과 달리 씨씨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그 중심은 자신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언저리라고 하는 게 적절하겠다. 언제나 사랑을 구걸하는 전화를 하며 흐느끼는 씨씨에게 브랜든은 '너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같은 성장 환경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에 대해 자신을 굳게 닫고 통제하려는 게 브랜든이라면 그 상처를 겉으로 꺼내 의지하려는 게 씨씨이다. 씨씨는 브랜든이야말로 그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인정해 줄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노래를 부르게 될 클럽으로 브랜든을 초대했을 때 부르는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은 그녀가 브랜든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자 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곡이다. 보통 뉴욕 찬가처럼 불려지는 이 노래가 씨씨의 입을 통해 불려질 때는 '뉴욕아, 제발 나를 받아줘'라는 간절함을 담은 호소로 들린다. '답답하고 지루한 고향을 떠나 이제 뉴욕으로 떠날 거야, 이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니 제발 나를 받아줘'라고 슬프게 읊조린다. 그 순간 씨씨의 노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장 잘 느낀 것은 바로 브랜든이었다. 그 공감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의 공감이었고 닮았지만 서로 다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시퀀스였다.

수 차례 자해의 흔적을 지닌 그녀의 팔목은 고향인 저지에서 있었던 그녀의 아픈 과거를 추측하게 한다. 그 과거는 그녀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상처가 그녀를 얼마나 주저앉혔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브랜든이 씨씨에게 퍼붓는 폭언은 그녀의 자존감에 위기를 만들고 절망적인 끝을 야기한다. 자존감이 약한 자에게 '너는 막장이다, 형편없다'는 식의 폭언으로 수치심을 주는 것은 그들을 벼랑에서 밀어내는 행위와도 같다.

 

영화의 절정에서 이 남매는 절망의 끝을 맛본다. 씨씨에게 폭언을 한 브랜든은 자신의 상태를 밑바닥까지 끌고 간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완벽주의자처럼 쏟아낸 폭언은 자신이 쌓은 수치심의 방어벽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읽힌다. 그 분노와 불안이 가져온 고통의 해소를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몸부림치고 일탈한다.  

그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브랜든의 폭언으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 씨씨는 스스로 팔목을 긋는다. 거울을 통해 둘로 보이지만 결국 한 인물처럼 닮은 이 남매의 절망적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일탈로 인해 훼손된 육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브랜든은 역시 훼손된 씨씨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병상으로 옮겨진 씨씨를 보며 브랜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녀로 인해 무너져 내린 방어벽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수치심을 그는 정면으로 바라보게 됐을 것 같다

 

영화 속 브랜든과 씨씨의 모습에서 나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있듯 나를 발견했다. 이 영화를 보고 도시인의 고독과 허무, 소통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존감이 결여되어있고 수치심에 대한 경계로 벽을 쌓고 있는 남매가 바로 고독과 허무, 소통의 문제를 끌어안은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야기시킨 것은 해체된 가족과 경쟁을 부추기며 동정 없이 차갑기만 한 세상일 것이다. 그런 사회, 도시에 살면서 개인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나 또는 우리의 모습이 브랜든이나 씨씨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육체를 훼손하며 극단의 밤을 거쳐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 브랜든과 씨씨의 이후를 생각하는 것은 동시에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연스레 이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당당하게 생각하는 오늘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