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라잇 온 미] 나의 영원한 등대가 되어줘_퀴어영화를 보는 자세에 대하여

 

라잇 온 미

나의 영원한 등대가 되어줘_퀴어영화를 보는 자세에 대하여

 

11 7일 압구정CGV 무비꼴라쥬에서 상영된 <라잇 온 미(Keep the lights on)>를 김조광수 감독,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와 함께 하는 시네마톡을 통해 관람했다. 올해 베를린에서 퀴어영화에 수여되는 테디상을 수상했고 감독 아이라 잭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영화 자체의 인상도 깊었으나 시네마톡을 통해 퀴어 영화를 보는 자세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라잇 온 미(Keep the lights on)> 게이 커플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성소수자로 외부인들과 겪어야 하는 일들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잘 만들어진 퀴어영화를 수입하겠다고 선언한 영화사 '레인보우 팩토리'의 김조광수 대표가 이 날 시네마톡에서 밝힌 영화의 수입 이유도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에 대해 고민과 좌절을 수반하고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만 하는 퀴어영화의 한계를 보란듯이 뛰어넘어 그들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를 소개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성애자가 하는 사랑'처럼' 표현된 동성애자의 사랑 이야기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겠다. 영화는 철저하게 동성애자로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니 여기에 '이성애자처럼, 이성애자의 관계처럼' 보인다는 표현으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파트너'를 찾고 만나는 방식에 있다. 폰 섹스를 통해 하룻밤 성욕을 해소할 상대를 찾기도 하고, 게이들이 모이는 바나 클럽에 가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만나고 섹스를 한다. 섹스로 시작한 관계가 유지되기도 하나 원나잇스탠드로 끝나는 것을 이상해하지 않는다. 이성애자는 그렇게 하지 않나? 그렇게 한다. 그렇게 만나기도 한다. 이성애자들도 폰 섹스 라인을 통하거나 채팅방 등의 경로를 통해 파트너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픽션, 논픽션을 막론하고 이성애자들의 만남 또한 (동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의해 주선되는 자리를 통하거나 클럽 등 사교의 장에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동성애자들의 그것보다는 더 다양할 것이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동성애자가 어떤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을 통해 파트너를 소개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면 만날 수 있는 방법 또한 그들의 커뮤니티 안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네마톡에서 정혜신 박사도 이야기 했듯이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그래서 파트너를 만나는 것이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나 클럽 등에서 파트너를 찾아야 하고 제한적인 기회는 오히려 깊이 있게 서로 알아가게 만들기보다는 일회적인 만남으로 그치게 하는 경우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은 이성애자들이 볼 때에는 좀 '문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히 문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란하기로 치자면 이성애자들의 그것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완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지만 '어쨌든 퀴어 영화'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나라는 관객은 이렇게 생각한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이성애자들의 멜로 영화, 로맨스에 익숙하다 보니 퀴어영화 속 표현은 말 그대로 'queer(괴상한)'가 되어버린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면서 혹여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그 낯선 것을 바라보는 '올바른' 방식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만드는 관계, 행하는 사랑, 나누는 감정이 아무리 이성애자와 같은 형태로 표현된다 해도 어쨌든 그들은 동성애자인 것이고 그것을 보는 나는 당연히 '다름'을 전제하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름'을 보는 시선과 수용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지에 대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혐오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편'하다는 표현 자체도 다시 생각해보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단어인 것이다.

<라잇 온 미>가 기존의 퀴어영화들과 달리 동성애자로서 이성애자들의 사회에서 살기 어려운 점을 묘사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 둘의 관계에 집중했다고 해도 이 영화를 퀴어영화를 보는 시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퀴어영화이고 나라는 관객은 이 영화를 올바른 시선으로 정당하게 수용하고 싶기 때문에 이성애자들의 사랑 영화를 볼 때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생각을 한 단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도 있으나 나는 그것이 '불편'하거나 귀찮지는 않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 등의 픽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찾아보는 이유 중의 하나 아니겠는가. 다른 문화를 접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봄으로써 알아가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영화를 보는 한 이유이기에 이런 작업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퀴어 포비아가 있을 수 있고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과 다르기에 퀴어 영화를 보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시네마톡에서 정혜신 박사가 얘기했듯이 동성애는 1970년대부터 정신의학 측면에서 수많은 (가혹한) 실험과 연구를 거쳐 치료의 대상인 질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성적 취향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무엇으로 보는 시선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정혜신 박사가 예를 든 '나는 키가 큰 남성에게 끌리는데 그것은 옳지 않으니 이제부턴 키 작은 남자를 보면 설레도록 해라' 라고 하는 것처럼 취향을 바꾸라고 강요 받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취향이고, 그 취향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기꺼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시네마톡에서 김조광수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성애자들은 퀴어 포비아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퀴어영화를 봤을 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지인 중에는 퀴어영화를 보면 체하는 사람도 있다.) 친구 중에 동성애자가 있거나 외국에서 동성애자 친구를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퀴어영화를 봤을 때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런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흔히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런 상황이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동성애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애자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이 (역시) 머리로는 이해 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축학개론>을 예로 들며, 승민(이제훈)이 서연(수지)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왜 옆에 납득이(조정석)가 있는데 엉뚱하게 서연한테 저러고 있냐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네마톡에 참석한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했지만 동성애자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동성애자 입장에서는 이성애자가 다른 대상이고, 이성애자 입장에서는 동성애자가 다른 대상이니 말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이슈라는 것이니 그렇게 이해한 머리의 느낌이 가슴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까지는 못하더라도 막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등대가 된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에릭(투레 린드하르트)과 폴(재커리 부스)이 처음 만난 것은 1998년이다. 그들은 그 후로 9년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에릭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고 폴은 출판사 담당 변호사다. 폴은 약물과 섹스 중독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여러 차례 둘의 관계는 위기를 만난다. 그래서 에릭은 폴을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기도 하고 그와 헤어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둘은 다시 만난다. 아니 만나게 된다. 폰 섹스를 통해 파트너를 만나왔던 그들은 서로 시간을 갖기 위해 떨어져 있던 때에도 폰 섹스를 통해 우연하게 연결된다. 여기에서 그들의 방탕함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파트너를 만나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연민이 생긴다. 젊은 남성의 육체는 섹스를 원하고 그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동성애자들에게는 제한적이다. 그리고 이성애자들과는 달리 그렇게 만난 파트너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떨어져 지내던 에릭과 폴이 우연하고 우스꽝스럽게도 폰 섹스 라인을 통해 다시 연결되는 시퀀스를 보면 그들이 사는 세상인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에서의 관계에 대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을 보면서 '웬만하면 서로 다른 사람 만나지'라고 외쳤던 마음은 '너희 둘은 어쩔 수 없이 만날 수 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약물에 찌들고 감정의 이해 지점을 서로 찾지 못한 에릭과 폴은 다시 한 번 헤어짐을 다짐한다. 그러나 나는 느낀다. 그 둘은 언젠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다시 섹스를 할 것임을 말이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서로의 살 냄새를 맡으며 안정을 찾을 것이다. 폴이 약에서 손을 떼지는 않을 것이고 에릭도 이고르를 또 만나더라도 그와 관계를 완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둘은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징글징글하지만 그 둘은 마치 서로의 등대라도 되는 것마냥 서로를 향한 그 빛을 '계속 켜 놓을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은 징글징글했기에 어쩌면 서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결론을 전했던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 같기도 하고, 징글징글하게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던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과 지오와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에릭과 폴은 그렇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빛을 끄지 않은 채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봄날은 이미 지나갔을지라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던 'This is how we walk on the moon' 이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어서 찾아보니 Arthur Russell이라는 아티스트의 곡이었다. 그는 유년기에 연주를 시작한 첼로와 피아노를 기반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뮤직씬에서 클래식과 디스코, 일렉트로닉을 결합한 음악으로 인정받았던 뮤지션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의 사후인 2000년대라고 한다. 그는 이미 1992년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음악을 알고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릭은 게이 커뮤니티에서 이름이 있는 어떤 사진작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공들여 한다. Arthur Russell이라는 아티스트가 사후 세상에 알려진 것도 에릭과 같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된다.  http://youtu.be/PjzsnNkL-7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