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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007스카이폴] 하늘이 무너져도 007에겐 솟아날 구멍이 있다

 

 

비밀스파이조직 MI6에 위기가 닥친다. 비밀요원들의 신상정보가 담긴 파일이 강탈당한 것이다. 이 파일을 훔친 자를 추격하는 제임스 본드. 터키의 지붕을 오토바이로 추격하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서로 엉겨 붙어 격전을 벌이는 본드와 그의 적. 그 격전의 순간을 지켜보며 본드를 돕기 위해 총을 조준하던 동료는 M의 사격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불확실한 타깃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결국 그 총알은 본드를 관통한다. 기차에서 추락해 저 깊고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으며 죽음으로 향하는 본드의 모습과 함께 아델의 '스카이폴'이 흐른다.

 

007 50주년 기념의 해에 완성된 23번째 007시리즈 <스카이폴>은 죽음에 이르는 문턱까지 이른 본드를 과감하게 오프닝에 보여주며 그의 부활과 함께 이 시리즈의 새로운 부활을 알리고 그 존재의 이유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믿음, 근원 같은 진지한 소재를 끌어들이며 50주년을 맞은 007이 앞으로 50년은 더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스카이폴>은 한마디로 영리하고 노련하며 우직하다.

 

M은 본드를 믿지 않았을까?

믿음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지만 믿음에 배신 당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균열의 시초가 된다. <스카이폴> 오프닝에서 M(주디 덴치)의 저격 명령에 의해 죽음에 문턱에 이르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를 보며 그가 다시 활동하는 순간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 M은 본드를 믿지 않았을까?'. 보통의 액션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였다면 이 정도의 위기 쯤은 주인공 스스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차 위에서 적과 격전을 벌이던 본드를 그냥 뒀다면 그는 보란 듯이 적을 소탕하고 도난 당한 파일을 안전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오프닝으로 시작했어도 문제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액션물의 전형일 것이다.

하지만 <스카이폴>은 오프닝부터 본드를 믿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M의 선택에 의해 본드가 위기에 처하는 시퀀스를 배치한다.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 본드는 자신을 믿지 않고 발사 명령을 내린 M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M의 선택에 대해 본드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고 그 선택에 배신감을 느꼈다면 복수의 칼을 갈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하지만 그는 제임스 본드다.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MI6본부가 폭탄 테러를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내 M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러셨나요, M?'. 위기의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이자 조직을 위한 책임임을 한치의 거리낌 없이 말하는 M과 그것을 받아들이며 다시 활동할 것을 준비하는 본드의 모습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제임스 본드와 M의 믿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편, <스카이폴>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악당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는 이런 M에 대한 믿음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하려고 한다. 믿음이라는 소재 하나를 가지고 동료와 적이 구분이 되게 하고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믿음의 중심에 M을 두고 본드와 실바를 대립하게 만듦으로써 영화의 갈등관계를 명확하게 한다. M이 거짓으로 전달한 '본드의 상태에 대한 소견서'를 가지고 실바는 본드를 위협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본드는 M의 자신에 대한 특별한 신뢰를 느끼게 된다. 이 장면만 봐도 동일한 조건 하에서도 믿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져 적과 동료를 구분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나아가 MI6 조직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청문회를 벌이며 불신하는 의회로 확장되어 또 하나의 대립각을 형성한다.

<스카이폴>은 세계 평화니 핵 공격이니 하는 거대하지만 고리타분한 외부의 적을 등장시키지 않는 대신 흔들리고 곪아터진 내부의 문제에서 영화의 갈등 요소를 찾는 것을 선택한다. 이 내부의 존재를 흔들고 개인과 개인 사이를 흔들고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문제로 응집되고 이것은 오히려 <스카이폴>을 현실에 더 가깝게 배치한다. 더불어 문제를 이 방향으로 집중시킴으로써 MI6 007로 대표되는 스파이 세계를 둘러싼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재정립하는 발판을 세워 궁극적으로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끝을 모르게 더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역할을 한다. 정말 영리하고 노련하고 우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클래식하지만 세련되게, 구관은 명관이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나 복귀한 후 몸과 정신 상태를 가다듬고 다시 현장에 투입되는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이자 MI6가 위기를 극복하고 재정비되는 이야기인 <스카이폴>은 시종 '구관이 명관'이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상하이 현장에 찾아온 동료가 본드에게 '당신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고 애쓰는 늙은 개 같다'고 한다. 조직원 명단을 강탈 당한 사건 때문에 M은 퇴출의 위기에 처하고 MI6조직은 해체의 위기까지 닥친다. 노장에 대한 경고장과 같다. 그러나 영화는 보기 좋게 퇴물 취급 받았던 자들이 자신들의 무기와 노련함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부활하는 것을 보여준다. 만년필 폭탄 같은 신개념의 신무기는 오히려 트랜드가 아니라고 말하는 '젊은 Q'(벤 위쇼)는 고전적인 무기에 꼭 필요한 기능만을 담아낸 무기를 본드에게 선사한다. 스코틀랜드의 저택 '스카이폴'로 향하며 본드가 운전하는 애스턴 마틴의 등장과 그 순간 오리지널 007 사운드 트랙이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어떤 관객은 환호성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옛 것도 기름칠하고 닦아내면 새 것처럼 작동한다. 겉모습이 젊고 화려하면 무엇 하나, 제 역할을 다한다면 내 손에 익은 게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스카이폴> 50년 전에 007 시리즈의 처음을 만났던 팬들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한편 액션 시퀀스에 매 순간 철저하게 계산된 조명과 유리, 거울 등의 소품을 통해 드러나는 영상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본드의 첫 등장부터 어둠과 빛, 그림자와 실상을 조화롭게 사용한다. 상하이의 고층 빌딩의 어둠 속에서 레이저 조명과 건물의 유리를 활용한 장면은 완벽하고 세련됐다.  저택 '스카이폴'이 있는 스코틀랜드를 비추는 장면은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명화와도 같다. 그야말로 어둠과 빛, 그림자와 몇 개의 조명과 소품으로 유려한 미장센을 연출해낸 장면은 모던하면서도 심플하다. 그렇게 <스카이폴>007시리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선보인다.

고전적인 무기의 틀 안에 신 기능이 들어있고, 노련한 인물들은 완숙함을 뿜어낸다. 젊은 Q를 포함하여 새롭게 등장하거나 새롭게 배치된 인물들은 새 것이되 그 캐릭터와 노련함은 옛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철저하게 계산된 세련된 시각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스카이폴>은 클래식하지만 아주 세련되게 '구관이 명관일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스카이폴-마치 어머니의 품 속으로 들어가듯이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가 아버지와 사별하기 전까지 살며 유년기를 보냈던 스코틀랜드의 저택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격전지로서 등장하는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근원을 만나게 되는 공간이자 다시 그 근원과 작별을 고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공간이 된다. 하늘 아래 얕게 파인 벌판에 우두커니 세워진 고저택 '스카이폴'. <스카이폴>에서는 유난스럽게 제임스 본드의 어릴 적 집까지 등장시키며 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간다. 오랫동안 집을 지켜온 관리인 킨케이드(앨버트 피니)를 통해 고아가 된 제임스 본드가 MI6조직원으로 단련되기까지의 어떤 단면이 슬쩍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제임스 본드에게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M이 그 공간에서 함께 마지막 격전을 준비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본드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그 '스카이폴'에서 자신의 근원을 다시 만나게 되고 요원 007로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된지도 모르겠다. 다시 MI6에서 미션을 받고 수행하게 될 제임스 본드의 이후가 기대되고 궁금해지게 되는 것도 <스카이폴>에서 그의 근원이 관객에게 공개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50주년을 맞은 시리즈의 재정비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다.

돌이켜보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007시리즈에서는 유독 본드의 개인적인 감정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그의 불행한 첫사랑과 그로 야기된 복수가 이어지는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에 이어 자신의 조직과 근원에 대해 바라보게 하는 <스카이폴>은 그런 특징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대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제임스 본드보다는 개인적 고뇌를 함께 안고 가는 제임스 본드가 이 시대에 더 어울리기 때문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에게 톰 포드가 만든 '본드 수트'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옷 역시 잘 맞아 보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007 비긴즈 - Made in U.K.

50주년 기념작이자 앞으로 50주년을 더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어쩌면 그것이 이번 시리즈의 목적이라고 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이 <스카이폴>이다. 혹시 이번 시리즈가 조금 심심하다고 느꼈다면 끊임없이 적과의 싸움으로 점철되며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보여줄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영화가 드라마를 선사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것은 50주년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재정비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재정비를 위해 구축한 공간과 캐릭터들이 완벽하게 조화롭기에 보는 맛이 특별하다. 이유 없이 내달리기만 하는 액션 영웅이 아닌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한 템포 숨 고르기를 할 줄 아는 액션 영웅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근래에 만들어지는 액션 히어로 영화들이 왜 프리퀄을 지향하고 그것이 트랜드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리즈로 갈수록 액션과 볼거리는 화려해지지만 어느 순간 그것만으로는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고 관객들은 외면하게 된다. 그렇기에 3편 이상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를 만들며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찾아낸 것이 그 영웅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시작점으로 가면 왜 그가 존재해야만 하는 지와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자아는 무엇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시리즈가 이어져 나가는 데 주요한 소재로 작용하며 큰 원동력이 될 수 있고 캐릭터에 묵직한 무게까지 부여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발견 아닌 발견 아니겠는가. 이미 50년이나 이어졌고 그 사이 제임스 본드 역할을 한 배우가 6명째인 007시리즈도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를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했을 것이다. 분명 영화 속 MI6조직이나 비밀요원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갖고 불신했던 무리들처럼 내부에 007 시리즈를 계속 지속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쏟아졌을 것이다. 냉전의 시대도 종식되고 핵무기를 위시한 3차 세계 대전을 위협 요인으로 끊임없이 등장시키며 우려먹는 것을 관객이 수용할 리는 없다. '본 시리즈'처럼 주인공의 개인적인 심리와 액션을 결합한 성공작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배트맨, 엑스맨, 슈퍼맨, 스파이더 맨 등이 계속 프리퀄을 만들며 부활하는 21세기에 007시리즈가 찾아낼 수 있는 최상의 답도 바로 이 '근원으로 돌아가 재정비 하기'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옛 것을 다 갈아치우고 새로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우아하고 품위 있게 권한이 위임되는 <스카이폴>의 선택은 높이 평가할 만 한다. 따라서 이런 드라마를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아메리칸 뷰티>의 감독인 샘 멘데스가 낙점됐던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카이폴>은 젊은Q를 소개했고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머니페니의 등장도 암시했고 더욱 건실해질 MI6와 제임스 본드를 약속한다. 감독인 샘 멘데스를 비롯하여 주디 덴치와 다니엘 크레이그는 물론이요 '스카이폴'의 지역 관리인으로 등장한 앨버트 피니와 (영국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한 두 번쯤 제임스 본드 역할로 물망에 올랐던 것으로 기억하는 레이프 파인즈까지 '끝내' 이 시리즈에 합류하는 것을 보면 이건 보기만 해도 분명한 'Made in U.K.' 인장을 찍는다. 영국의 자부심이기도 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50주년을 기념하고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 <스카이폴>의 영리하고 세련되고 우직한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2012년 영국이 수확한 것 두 가지를 말해보라면 하나는 (오심으로 물들긴 했으나) 런던 올림픽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007 스카이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