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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창피해] 사랑이란 기억으로 완성되는가?



<창피해> CGV상암 무비꼴라쥬 시네마톡_김수현 감독, 김상현 배우, 송지환 무비위크 기획위원과 함께

 

창피해? 이상해!

영화 <창피해>는 이상한 영화다. 수업중인 미대 강의실로 보이는 곳에서 학생이 교수한테 혼나는 장면으로 느닷없이 시작한다. 객석에선 영화 시작한거야?’ 하는 웅성임이 들린다. 느닷없이 시작한 영화는 이후 세 명의 지우들을 등장시킨다. 이 세 명의 지우가 각각 만나는 그리고 만났던 이야기를 오고 가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안에 왁자한 수다도 있고, 처절한 몸싸움도 있고, 몽환적인 퍼포먼스도 있다. 초반엔 제법 발랄하고 인물들 간의 만남의 호흡도 경쾌하다. 소매치기 강지우(김꽃비)가 옥상에서 투하하는 간접 체험을 시도한 윤지우(김효진)와 만나게 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트랜디 드라마의 감성 같기도 하고 장진 식의 엉뚱한 판타지 같기도 하다. 바닷가로 촬영을 하기 위해 떠나는 교수 정지우(김상현)와 모델 윤지우의 묘한 분위기로 이어지면 영화는 순식간에 느낌을 반전시킨다.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 세 지우들의 이야기가 흘러 영화의 끝은 첫사랑 같이 수줍게 경쾌하면서도 귀엽다. ‘창피해라는 감정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여서인지 이상하게도 영화의 내러티브를 나열하게 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에게 갖가지 감정을 전달하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란 기억으로 완성되는 게 아닐까?

기억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요리할 지 고민했다.”_김수현 감독

영화 속에 강지우는 오로지 기억 속에만 등장한다.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반복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밖에 없는 구성을 지닌다. <창피해>의 재미있는 요소는 과거를 보여줄 땐 현실적인 모습을 띄고 현재를 보여줄 땐 판타지적 설정을 가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마치 기억 속 저 너머 과거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윤지우가 자신의 기억 속 사랑을 설명할 때 사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수갑을 차고 내내 붙어 다녀야 해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침대에 함께 있었던 것 등을 보면 설마 저렇게까지하고 의심이 될 수도 있다만 기억, 즉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며 맛있어 보이기까지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생기가 있다는 뜻이다. 반면 현재는 스산하다. 바닷가로 촬영을 위해 들어간 팀은 날씨 문제로 촬영을 못하고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들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회색적이다. 우울해 보인다는 뜻이다. 술을 먹고 바닷가를 거닐지만 심심하다. 실제인지 꿈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헛갈리는 웨딩드레스 퍼포먼스와 바다 속에서 펼쳐지는 태아 퍼포먼스는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인 느낌을 준다. 기억으로 묘사되는 과거는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고 경쾌하고 뚜렷하다. 반면 현재는 가라앉아있고 차갑고 건조해 보인다. 아마도 사랑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기억에 대한 맛있는 묘사는 기억을 빌려 묘사되는 사랑 또한 맛있었겠다 짐작하게 만든다.

 


여성이야기를 하기 위해 남성 이야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_김수현 감독

<창피해>를 보기 전에 어쩌면 유일하게 접했던 정보는 이 영화가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그렇게 설명하는 게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동성애 영화라고 한다면 관계의 묘사와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점 또는 그로 인한 갈등과 고민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이야기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창피해> 속 동성애는 그런 예상을 모두 지우게 만든다. 그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기까지 고민하거나 주변 반응을 의식하는 것에서 오는 고민과 갈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장애요소 등이 없다. 그저 그 관계 속에서 서로 바라보고 느끼는 것들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동성애라는 소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덕에 관객에게 영화 속 관계들이 낯설어 보이지도 않는다.

감독은 소위 여여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서로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였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남성의 이야기도 세심하게 다룬다. 수갑을 한 쪽씩 차고 다닐 수 밖에 없던 두 지우와 형사(최민용)는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먹는다. 형사는 두 지우가 술을 마시면 하나 둘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게 될 것이고 그게 수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장면들은 우스꽝스럽다. 형사의 짐작은 어긋나고 오히려 자신과 주방장(우승민)의 여자관계와 치부가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유독 튀는 설정이라서 그 시퀀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객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그 우스꽝스러운 난장판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 영화 속에서 남자 이야기를 넣기 위한 장치 또는 여여 관계를 납득시키기 위한 요소로서 가치가 있어 보인다. 녹록하지 않은 남성의 삶과 그 세계의 단면 같기도 하고, (비약이 심한 이해일지는 몰라도) 남녀의 관계란 저리도 복잡하고 피곤하니 차라리 여여(또는 남남)가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도 있을 듯 하다.

강지우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등장과 여교수의 촬영팀에 있는 조교로 보이는 남자, 강지우의 생부처럼 보이는 스님과 마지막 식당에 등장하는 남자()까지 어쩌면 여자들이 바라보는 판타지적 남성 같기도 하지만 바라보는 상대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남성들의 존재도 놓지 않는 영화로서 받아들여진다.    

 


디테일한 디렉팅이 없는 게 배우로서 설렘을 갖게 했다.”_배우 김상현

영화 속 배우들간의 화학작용은 인상적이다. 세 지우는 각각 개성이 넘치지만 그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는 굉장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윤지우(김효진)는 백화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뭔지 궁금하다며 납치한 마네킨과 같은 옷을 입고 와인을 마신다. 강지우(김꽃비)는 소매치기다. 과거에는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만 미묘한 곳을 파고드는 손길에 매력을 느껴 소매치기를 한다고 설명한다. 정지우(김상현)는 미대 교수다. 자아가 강해 보이고 바닷가에서 웨딩드레스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어느 캐릭터 하나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이 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조화가 묘하게 재미있다. 이름이 모두 같지만 서로 매우 다른 세 캐릭터를 연기하는 세 배우는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매력을 발산한다. 시네마톡에서 배우 김상현은 디테일하게 디렉션을 주지는 않지만 그런 점이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 설렘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김수현 감독도 “3~4회 촬영을 거치면서 촬영장에서 재미나게 노는 배우들을 보면서 캐스팅이 잘 됐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배우들은 뭔가 특별한 자유를 느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캐릭터의 이해를 위한 시간 속에서 그 캐릭터들을 이상한 캐릭터가 아닌 자연스러운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시네마톡에서 배우와 감독을 향한 질문들에 답이 나오기까지는 3~5초 가량의 멈춤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해서는 관객이 재차 따지듯 질문하기도 했었다. “왜 캐릭터 이름이 다 지우인가?” 하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관객은 영희,지영,혜수,민경 등도 가능했을 텐데 왜 지우인가, 혹시 감독의 지인인가, 뭐 그런 게 궁금했던 것 같지만 그 질문을 받은 감독과 배우는 캐릭터의 느낌에서 떠오른 이름이 아닐까 혹은 그냥이라고 답을 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건 다시 말해 이런 거였다. 느낌을 갖고 느낌을 표현하려 한 것인데, 그 느낌을 느낀 인과관계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라고 하는 것 같은 거다. 꿈꾸고 일어나 재미나게 꿈 얘기 해주는 사람에게 진지하게 네가 왜 그런 꿈을 꾼 건지 사실적인 이유를 찾아내라고 하는 격 이랄까. 이 날 시네마톡에서 나온 몇 개의 질문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고 받아지는 것을 보며 이건 묻고 답할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각각 느끼면 그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느낌을 공유하면 모를까 저건 왜 저렇게 했나, 그건 무슨 뜻인가 등의 질문은 애초에 필요 없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감독 스스로도 디테일한 디렉팅을 하지 않았던 영화의 완성본을 보고 디테일한 설명을 하라고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열리지가 않아!_영화 속 윤지우의 대사

영화의 후반부 윤지우와 강지우는 진흙탕에서 뒹굴며 다툰다.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자 최초의 갈등과도 같은 장면이다. 보는 관객으로서 강지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면서도 이전의 강지우의 행동이 이해되는 묘한 장면이다. 미묘한 곳을 파고드는 손길에 매력을 느낀다는 강지우는 스님의 손길에도 이상스레 씨익웃는다. 거기서 이해가 된다. 자신이 느끼는 그것을 타인에게 이해 받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 힘듦이 강지우의 방황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그 이해 받음은 사람을 열리게 만드는 유일한 열쇠일지 모른다.

윤지우는 말한다. 자신은 이타적인 사랑을 하는 유전자를 지녔다고. 이는 동성애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어떤 사랑도 이타적이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이타적임이 사라질 때 갈등은 폭발한다. 윤지우는 너를 사랑한 것도, 증오한 것도 나라며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지나버린 찰나다. 강지우는 윤지우가 자신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알긴 알겠지만 열리지가 않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창피해_사랑의 표식

영화의 마지막은 꽤 인상적이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 모습. 기억을 통해 사랑이 완성되는 것 아니겠냐 하던 감독의 말이 떠오르고 왜 제목이 창피해가 됐는지 살짝 짐작하게 만드는 장면. 그 장면을 보고 나면 극장을 좀 포근해진 마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