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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비밀은 없다] 마음의 소리가 터지면 비밀은 없다


마음의 소리가 터지면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연홍(손예진)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렸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어딘가를 응시하던 소녀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등장했던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말이다. 첫 장면부터 그러하니 이 영화의 첫 시사 이후 쏟아졌던 박찬욱 풍이라는, 그것도 '지나치게' 박찬욱 풍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평가나 짐작은 맞기도 하고 굳이 그렇게 말할 것도 없기도 하다는 결론을 냈다.

 


박찬욱과의 연결성은 <비밀은 없다>와 이경미 감독에게 있어 결코 비밀일 수 없다. 이미 이경미 감독의 데뷔작인 <미쓰 홍당무>때부터 박찬욱 감독은 이경미 감독의 조력자이자 공동 시나리오 집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미쓰 홍당무>에도 역시 박찬욱의 향기가 배어나지만 어디까지나 이경미라는 신인 감독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박찬욱과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 한 두 번째 연출작 <비밀은 없다> 역시 박찬욱의 느낌이 드러나지만 여전히 이경미의 영화이다.




국회의원 선거 유세 시작일에 실종된 아이, 아이의 행적을 좇는 엄마와 선거 앞두고 입장을 고려해야 할 아빠. 이 소재만 던져주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한다면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갈래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캐릭터를 어떻게 쌓고 설정을 어떻게 붙이고 플롯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완성된 결과물은 만든이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그냥 평범하거나 할 것이다. <비밀은 없다>는 전자의 경우다. 이 소재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 이런 캐릭터, 이런 대사, 이런 음악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이경미 감독 뿐일지도 모른다. 관객 눈치 안 보고 거침없이 내뱉어지는 대사, 있지도 않은 Joan Faye라는 아티스트를 만들어 관객의 귀에 내려앉는 Wild Rose Hill이라는 노래로 이야기를 이끄는 아이디어, 문득문득 소름 끼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은 이 작품을 그냥 평범하게 보도록 놔두지 않는다. <비밀은 없다>의 캐스팅 소식을 단신으로 전했던 영화 잡지에서는 손예진의 캐스팅을 알리며 그녀가 연기할 연홍을 '학창시절 걸그룹이 되고 싶었던 여자'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사를 읽으며 나는 이 영화가 <미쓰 홍당무>를 만든 이경미 감독이 또 한번 개성 있는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코미디가 가미된 작품을 만드는구나 했었다. <비밀은 없다>는 코미디는 아니지만 <미쓰 홍당무>가 그러했듯이 진지한 상황에서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나 행동이 특이하면서도 현실적이어서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마저도 박찬욱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건 박찬욱 보다는 <킬러들의 수다> <박수 칠 때 떠나라>에 드러났던 장진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가 있다 해도 이 작품은 <미쓰 홍당무>에 이은 이경미표 영화라고 하고 싶은데 그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여교사라는 캐릭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미쓰 홍당무>에서 황우슬혜가 연기했던 여교사 이유리에 대한 기억은 <비밀은 없다>에서 최유화가 연기한 여교사 손소라를 보면서 자연스레 떠오른다. 두 인물의 성격은 다르나 극에 미치는 둘의 기능은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교사 특히 여교사에게 갖고 있는 이경미 감독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 지점이기도 하고 이것이 이경미 영화의 인장과도 같다면 세 번째 작품에도 여교사 캐릭터가 등장할 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한편 여성의 연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밀은 없다> <아가씨>를 자연스레 연상하게 한다. 박찬욱 감독과 <친절한 금자씨><싸이보그지만 괜찮아><박쥐><아가씨>까지 시나리오를 함께 만들어 온 정서경 작가가 <비밀은 없다>에 역시 합류했으니 <비밀은 없다> <아가씨>에 모두 여성의 연대라는 키워드가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발견 같다. 누군가의 자장이 크게 작용했다기 보다는 그들의 연이은 공동작업의 결과로 보이고, 지금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여성과 여성의 연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트렌드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서서히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걸 증명하면서 오롯이 떠오르는 것이 여성의 연대이다. 걸그룹이 되는 게 꿈이었던 엄마와 그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끼를 발산하는 딸의 설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딸이 실종되던 날 만나러 간다던 친구 자혜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나 "엄마는 바보 같아서 자기가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요."라는 딸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비밀은 없게 만들어버린 모녀의 연대는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의 연대 못지 않다.  

 




<비밀은 없다>에 등장하는 묘한 장면들은 영상과 사운드의 부조화가 만들기도 한다. 더빙이 잘못된 냥, 믹싱 오류인 냥 보여지는 대화하지 않는 배우들 위로 덧입혀진 대화하는 소리는 마치 마음의 소리가 퍼질 때 비밀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소리를 내면서 대화를 하거나 싸움을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없다. 그러나 침묵 속에 눈빛만 주고 받는 장면에 덧입혀진 소리에선 속내와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그 인물들이 나눈 대화 소리를 다른 장면에 덧입힌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되뇐 마음의 소리가 퍼지면서 점점 비밀은 없어진다.

 


손예진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눈빛, 감정, 대사의 힘이 모두 좋고 새롭다. 김주혁과의 호흡도 자연스러운데, 특히 김주혁에게 한 싸대기 맞고 삼 싸대기와 침으로 맞받아치는 육탄전 시퀀스는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그 장면은 영화를 다 본 후 다시 의미를 곱씹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