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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아가씨>가 공개됐다. 타이틀롤인 아가씨 히데코를 연기한 김민희의 다채로운 모습과 신인 김태리(타마코,숙희 역)의 전혀 밀리지 않는 당당한 연기, 하정우(사기꾼 백작 역)와 조진웅(이모부 코우즈키)이 합세한 스타 파워에 특별출연으로 엄청난 신스틸러가 된 문소리(이모)와 김해숙(사사키)의 모습은 수려한 영상 안에 유려하게 펼쳐진다.

시선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면모 속에 <아가씨>는 철저히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개인과 여성을 넘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할 여지를 남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재단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빈틈 없어 보이면서도 힘을 모조리 빼고 제 맘대로 지껄이고 휘갈기는 풍이 그로테스크하고 마이너적인 전형적인 박찬욱의 영화 같다.

 




코우즈키의 여자, 이모 그리고 히데코


아가씨 히데코를 이해하기 위해 이모의 존재가 중요해 보인다. 이모는 히데코의 삶을 먼저 산 사람으로 이모부인 코우즈키의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모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코우즈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공포스러운 상황을 히데코는 이모를 통해 경험했고 그것은 히데코를 억누르는 트라우마가 된다. 박찬욱의 영화답게 공감각적으로 기괴한 느낌을 주는 여러 장면들이 <아가씨>에도 등장한다. 특히 이모가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모두 기괴하다. 웃는 소리도 무표정하게 말하는 모습도 기괴하다. 그림책을 보면서 단어 하나하나 발음하게 하는, 마치 낭독을 위한 기초 단계의 연습인 듯한, 장면에서 코우즈키의 손에 눌린 두 여자의 모습에서 그 기괴함은 소름 끼칠 정도다. 짧지만 강렬하게 코우즈키의 여자로 산다는 것의 징글징글함, 기괴함을 선보인 장면들은 코우즈키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히데코의 결단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기에 충분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다짐과 실천은 자유와 독립, 성장의 주체를 단지 히데코 개인에게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시대 이 나라로 확장해서 이해하게 한다.

 


독립을 외치는 기괴한 방식


세대를 넘어 유산처럼 전해진 억압을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꾀하는 여성의 모습을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펼쳐내는 것도 그 시대를 담은 다른 영화들이 택하는 천편일률에서 벗어나면서도 결국 결은 같다는 인상을 남겨 독특하기도 하다. <아가씨>가 보여주는 것은 독립을 위해 조직을 꾸리고 암살을 꾀하는 그 시대의 이야기는 확실히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문화에 흠뻑 빠진 개인과 그 개인에게 지배당하는 개인, 그들로부터 물질적으로 귀속된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온통 왜색적인 것으로 진하게 물들인 영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 모든 부정한 억압과 폭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계획과 시도,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메시지들과 결을 같이 하는 묘한 독특함을 지닌다.    

 




3부 구성, 장점과 단점


영화는 3부의 구성을 지닌다. 1부는 사기꾼 백작과의 계략을 갖고 히데코의 몸종으로 들어간 타마코(숙희)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맺는 1부의 끝의 혼란은 이내 히데코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2부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2부에서는 앞서 언급한 히데코와 이모, 이모부 코우즈키의 관계와 그 안에서 히데코가 겪어내야 했던 삶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드러난 상태에서 시작되는 3부는 어쩌면 예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사실상 확인시켜주는 설정이기에 상대적으로 촘촘한 맛은 없다.

히데코가 두려워하고 긴장하는 낭독회의 진상이 하나씩 밝혀질 때의 충격, 나무에 묶인 밧줄이 무엇인지 스치듯 지나간 장면 이후에 설명이 되어지는 것 등 <아가씨>는 양파 껍질 벗기듯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실체를 만나는 재미가 있는 플롯을 지닌다. 그러나 일면 성긴 부분이 있다. 가령 3부에서 히데코와 백작의 호텔 장면은 성기다는 느낌을 주며 실소를 자아낸다.

 




달린 것들의 안도와 소멸, 방울을 흔드는 안 달린 것들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놀라운 점은 사건이 꼬이고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둘이 감정적으로 끌리고 육체적으로 가까워지는 모습들은 전체 영화라는 큰 나무에 기어오르는 다람쥐 같은 부분 같지만 결국엔 멀리서 그 나무를 바라봐도 그 다람쥐들만 보이게 할 정도로 결국 영화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 감정이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설정에 꽤 공을 들인 것 같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이를 갈아주는 목욕 장면이나 이후의 정사 장면은 파격적이고 노골적이면서도 장난스럽고 귀엽기까지 한데 그것은 히데코와 숙희가 차곡차곡 쌓아가는 감정에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리듬을 잘 맞춘다. 히데코가 살아온 스토리와 히데코와 숙희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한편 욕정과 물욕에 젖은 변태적인 무뢰한으로 존재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슬슬 그 세상에서 존재 가치를 상실해간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모두 수집된 장소에서 소멸되고 가까스로 남근만은 지켰다고 안도하며 스러져간다. 영화의 풍자와 해학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해 희화화되고 모자란 존재로 묘사된 남성들은 결국 영화 속 여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며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존재들이 된다. 남자들이 욕망의 도구로 자신들에게 선사한 방울을 들고 아이들이 장난하듯 꺄르르 웃으며 정사를 벌이는 두 여인을 롱테이크로 비추는 마무리는 강렬하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구경하던 낭독회의 남성들은 존재감 없이 사라져버렸고, 다만 그 행위를 하는 여성들만이 이제 그것을 온전하게 주체적으로 즐기는 장면으로 보인다. 남성에 의해 그것을 읽고 연기해야 했던 여성과 그것을 보며 쾌감을 느꼈던 남성으로 행위자와 즐기는 자가 분리되었던 지난날의 부조리가 모두 무너지고 행위 하는 자의 온전한 선택으로 그 즐거움도 온전히 행위자의 것이 되는 오늘의 시작으로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관객은 그 장면을 구경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스텝들도 모두 빠지고 무인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뒷이야기는 그 장면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가 촬영 과정에서도 수행된 것 같아 장면의 톤과 달리 어딘가 엄숙한 인상도 남긴다. 그렇게 히데코와 숙희는 자신들을 옭아매고 속박했던 달린 것들이 묶어놓은 밧줄을 끊어내고 그들이 선사한 방울을 흔들며 주체적으로 탐닉하는 것이리라.

   



플롯이 주는 짜릿함보다는 여성주의 메시지에 그 모든 재료를 자기 방식으로 꼬아엮은 감독의 재주에 머리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이다. 끝까지 남근은 지켰다고 안도하는 남성과 끝끝내 놀이로도 남성 따윈 필요 없음을 표출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춘화와 도색화, 외설적인 소설을 넘나들며 풍자와 해학을 뿜어내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영국 작가 새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 원작으로 한다니 박찬욱은 영리한 예술가요, 괴팍한 작가 같다. 동시에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복 받은 감독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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