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한나] 케미컬 브라더스의 음악+그림형제의 집+조 라이트+명품 배우=<한나>에 아우라를 입히다


눈 덮인 숲 속, 사냥감을 노리는 소녀의 파란 눈빛이 빛난다. 소녀의 날카로운 화살에 쓰러진 사냥감을 보고 소녀는 말한다. ‘심장을 비켜갔어’. 그리고 이어지는 총성. 이 차갑고 고요하면서 날카로운 오프닝 시퀀스는 마지막을 위한 양념이 된다는 걸 그 순간에 알 수는 없었다. 핀란드 숲 속 오두막에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 그녀는 아버지 에릭(에릭 바나)으로부터 암살자로서 훈련을 받고 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의 위장 신분에 대해서 술술 내뱉는다. 모든 외부환경으로부터 차단된 채 자란 것으로 보여지는 이 소녀의 유일한 교본은 아버지와 책이다. 잠자는 순간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도록 훈련된 소녀는 드디어 외부 세계로 나설 순간을 만난다. 복수의 대상인 CIA요원 마리사(케이트 블란쳇)를 죽이라는 미션을 안은 채. 미션을 달성하고 베를린의 그림형제의 집에서 아버지와 재회를 약속하고 소녀는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영화 <한나>의 등장은 다소 예상 밖이었다. 암살범으로 훈련된 미스터리한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의 등장은 다소 느닷없었다. <킥 애스>힛걸이 있었으나 액션 영웅들이 떼로 등장하는 그 영화의 선과 <한나>를 같은 궤에 놓을 순 없을 것 같다. 때문에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느낌은 이게 뭐지?’였었다. 그래서 찬찬히 살펴보니 감독은 <오만과 편견><어톤먼트>를 만들었던 조 라이트, 주연 배우는 <어톤먼트>의 소녀 시얼샤 로넌이고 에릭 바나와 케이트 블란쳇까지 보인다. 거기에 제작은 포커스 필름이었다. 제목과 포스터가 주지 못했던 기대감을 이 이름들이 단번에 강한 호기심으로 바꿔놓았다. 그렇게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다.

 


첫 장면부터 차갑고 절제된 눈빛과 행동을 보여준 한나(시얼샤 로넌)는 그 첫 장면만으로도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듯 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임에도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배우의 연기력도 주요했겠지만 캐릭터가 뿜어내는 익숙한 향기가 관객으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그 소녀를 받아들이게 만든 것 같다. 한나는 숲 속 오두막에서 전기도 없이 생활하며 백과사전과 동화책으로만 세상을 배운다. ‘음악이라는 것은 대표적인 예인데 듣지 않고 책에 쓰여진 대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이 한나의 배움이 불균형적이고 오류를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일방적인 매체로부터 세상을 배우는 그녀는 언뜻 라푼젤을 연상시킨다. 높은 성 안에 갇힌 채 마녀의 정보로만 세상을 알아왔던 소녀 라푼젤 말이다. 영화의 아주 중요한 소재이자 배경인 그림 형제의 집도 덕분에 자연스레 이어진다.

한 편으로 그녀는 뤽 베송 감독의 영화인 <니키타> <5원소>를 떠올리게 한다. 역시 암살자로 훈련된 니키타가 마트에서 만난 남자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순수한 모습은 처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소년과 데이트를 하는 한나의 모습에 슬쩍 스친다. <5원소>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연기한 릴루의 무표정하고 어리둥절한 얼굴 또한 겹쳐진다. CIA 연구소에서 탈출하는 한나의 모습은 장면 자체가 뤽 베송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연상되는 캐릭터는 <>시리즈의 본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잊혀진 자신의 정체를 찾아 떠나는 본의 여정은 역시 자신의 정체를 담은 DNA자료를 갖고 근원을 알아내고 싶어하는 한나의 모습과 겹친다. 이런 기존의 캐릭터들이 언뜻언뜻 보이지만 이는 관객들에게 한나를 친숙하게 만드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옅은 눈썹으로 무표정하게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한나는 그 익숙한 캐릭터를 내재화 하면서도 독특하게 빛난다. 캐릭터의 단순 모방이 아닌 창조적 조합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영화를 보면서 예상치 못하게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고 영화에 독특한 색채를 가하는 것은 케미컬 브라더스의 음악과 그림형제 하우스라는 장소였다. 한나가 CIA연구소를 탈출할 때, 미로같은 원형 통로를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로 통과할 때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면과 조화를 이뤘던 케미컬 브라더스의 음악은 관객의 몰입도를 상승시키고 심장을 뛰게 한다. 그들의 음악은 한나의 움직임에 금속성을 더함과 함께 살며시 인간성을 드리우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한나라는 캐릭터가 세상과 부딪히면서 겪게 되는 심리 상태와 일치되면서 매우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다. 근래 들어 가장 귀에 와 닿는 OST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를린에 있다는 그림형제 하우스도 영화에서 처음 보는 장소다. 이 장소는 여전히 동화의 세계에 머물 것만 같은 어린 소녀의 감성이 납을 녹인 물질의 주입으로 뛰지 못하고 서서히 굳어져 차가워지는 듯한 한나의 내면을 고스란히 공간화한 느낌을 준다. 과자로 만든 집처럼 환상적인 외양을 갖고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왠지 태엽장치가 삐걱거리는 기계음을 낼 것 같은 공간이고, 그 집을 지키는 아저씨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끔찍한 공간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한나와 마리사의 숨바꼭질 같은 장면, 늑대의 벌린 입과 그 안으로 펼쳐진 컴컴한 터널을 지나 벌어지는 최후의 격전은 이 영화에 진정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한나 역할을 한 시얼샤 로넌이 놀라운 건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저 어린 배우가 액션과 함께 저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소화하느라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과하게 힘든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를 볼 때 들 수 있는 생각인데 이 소녀는 그런 딴 생각을 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스크린에서 처음 본 배우도 아닌데 신비로운 기운도 뿜어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 그 자체로 그녀의 연기를 보게 만드는 매력을 선보인다. <어톤먼트> 이후에 다시 한 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에릭 바나는 비중이 적은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빛이 난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트로이>에서 헥토르로 분했던 그의 캐릭터의 인상 때문인 듯 하다. 에릭은 아버지로서 한나를 훈련시키지만 그녀가 미션을 수행할 동안 곁에 있지 않는다. 때문에 화면에 자주 비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라도 한나가 위기에 빠질 때 곧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그 캐릭터에 있다. 헥토르에게서 받았던 신뢰할 수 있는 듬직한 이미지가 배우 에릭 바나에게 각인되어있고 그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도 잘 활용한 듯 하다. 같은 이유로 놀라운 건 케이트 블란쳇도 마찬가지다. 외모와 억양에서도 변화를 준 이 배우는 그 호기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분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가 이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그녀가 처음 풀샷으로 비춰지는 장면에서 변신한 모습에 새삼 놀라게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CIA 요원으로서도 케이트 블란쳇은 변신의 귀재임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