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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측벽을 허무세요,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Medianeras, Sidewalls

측벽을 허무세요,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마틴의 방과 마리아나의 방

 

마틴(하비에르 드롤라스) 10평 남짓의 원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은 도시 주거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들을 비난하면서도 그 공간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본인을 설명한다. 웹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더욱 그를 외부로부터 단절시킨다. 공황장애와 신경쇠약으로 상담을 받을 때나 강아지 산책을 시킬 때만 외출하는 정도다. 자다가도 척추 증상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깨고 마는 그. 외출 시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비상 물품들을 챙겨서 들고 다닌다. 그 안에는 선별된 수천 곡의 음악이 담긴 아이팟과 자크 타티의 영화 세 편 그리고 콘돔 세 개가 들어간다. 수영장 회원권을 끊어놓았지만 실제로 가지는 못한 채 기나긴 겨울을 보낸다.

 

마리아나(피욜라 로페즈 드 아야라)는 건축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건축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공황장애로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니 고층 건물은 그녀에게 보기에도 불편한 떡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지만 아파트 8층에 사는 그녀는 계단을 이용해야 하므로 하루 세 번 외출할 때 큰 작정을 하고 나선다. 건축 대신 쇼윈도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는 늘 마네킨을 곁에 둔다. 수영장 회원권을 끊어놓고 오랜만에 찾은 수영장에서 재미있는 남자를 만나지만 연애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우울하다. 늘 곁에 두고 영감을 얻는 남성 마네킨을 끌어안고 외로움을 달래며 기나긴 겨울을 보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마틴과 마리아나. 각자의 삶을 그들의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 그래픽, 건축물 등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관객들은 이런 소재의 영화의 오랜 공식에 따라 언젠가 둘이 만날 것이고 둘이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될 지 궁금해지고 확신하기는 어려워진다. 우디 앨런의 영화 <맨하탄>의 엔딩을 보면서 감동에 젖는 두 사람이 영화 <접속>의 두 사람처럼 '언젠간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은 느껴지지만 어떻게 만나게 될 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싱글이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막막해지는 것이다. 이런 고민 또는 질문은 결코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마리아나가 어릴 적부터 '인생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월리를 찾아라>처럼 북적대는 도시에서 누군가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한 채 '소울 메이트'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봄이 오고 측벽을 허물어 창을 낸 마리아나와 마틴

 

측벽을 허무세요, 빛으로 다가가세요!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춥고 긴 겨울처럼 지루하고 청승맞고 우울하게, 결핍되거나 고립된 채로 흐르던 싱글의 시간은 봄이 오고 측벽을 허물어 창을 내면서 서서히 회복의 기운을 드리운다.

마리아나는 건물의 측벽이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측벽은 마치 안 좋은 습관을 모아놓은 것 같다며 먼지만 쌓이고 광고를 해도 폼이 안 나는 그 측벽을 허물어 10평 남짓의 원룸에 창을 낸다.

그 시간 마틴도 측벽을 허문다. 허문 측벽에 낸 창을 열면서 비로소 두 사람이 바로 옆 건물에 살았다는 사실은 시각화 되어 관객에게 보여진다.

 

봄이 오고 마틴과 마리아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True love will find you in the end)' 라는 노래는 희망의 전주곡이 된다. 조금은 느닷없는 서로 알아봄은 그 전에 몇 번의 우연 끝에 부딪힌 손끝에서 찌릿하게 오른 전기를 전조로 이해를 구한다.

영화에서 둘은 몇 번에 걸쳐 우연히 스치고 지나간다. 이는 도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겨져 억지스럽지 않다. 둘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도 만나게 된다. 여자는 싱글 생활의 우울함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하고 남자는 그 방면엔 자신이 전문가라며 책을 쓸 수도 있다고 한다. 자신은 우울증에 걸린 파울로 코엘료라며.

하지만 분위기 좋았던 그 채팅은 정전과 함께 결실 없이 끝나고 만다. 그렇게 그 둘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또 스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전조를 만든다. 어둠을 피해 빛을 찾으러 나간 두 남녀는 서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번쩍하는 전기의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지루하리만치 현실적인 일상을 담아내던 영화가 마지막을 번쩍하는 순간처럼 느닷없이 맺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건 여자가 내내 들여다봤던 <월리를 찾아라>나 남자가 규칙적으로 했던 '강아지 산책'을 들어 설명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으나 그게 정답이라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예측했던 대로 그들이 수영장에서 만나게 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번쩍했던 순간을 경험한 그 둘만 아는 순간일 것이다.

다만 우리도 낡고 안 좋은 습관이 드리워 우울하고 추운 계절에 더 도드라지는 측벽을 허물어버리기를 시도하고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빛으로 향해 가면서" 각자의 번쩍하는 순간에게 기회를 열어놓을 따름이다.

 

 

*영화 속에는 두 곡의 노래가 흐른다.

하나는 엔딩에 두 사람의 립싱크로 들려지는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다른 하나는 봄이 찾아옴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True love will find you in the end'.

'Ain't no mountain high enough'가 사랑을 이룬 사람들이 찬가처럼 부를 수 있는 곡이라면

'True love will find you in the end'는 사랑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하는 곡이라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더욱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그 사람이 당신의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그러나 슬퍼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결국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빛으로 향해 가세요, 그럼 진실한 사랑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