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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더 테러 라이브] 무엇이 테러를 저지르게 만드는가

 

더 테러 라이브

무엇이 테러를 저지르게 만드는가

 

 

한때 잘나가던 엥커였으나 밀려나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윤영화(하정우). 청취자로부터 세제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으며 무료하게 방송을 진행하던 어느 날, 범상치 않은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건성으로 그 남자의 전화를 끊은 윤영화. 그러나 전화는 끊기지 않고 남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한강대교를 폭파할 것이란 협박을 한다. 미친놈의 헛소리쯤으로 넘겨버렸으나 잠시 뒤 굉음과 함께 마포대교의 폭발은 현실이 된다. 남자는 30년 전 시작된 억울한 일에 대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며 그대로 하지 않을 경우 더 큰 폭파와 피해가 일어날 것이라며 위협한다. 감각적으로 이 전화가 자신의 입지를 회복시킬 기회라고 생각한 윤영화는 적극적으로 테러범과의 통화에 나선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언론사 내부의 줄타기와 이권다툼, 여기에 정치권과의 결탁, 언론사끼리의 경쟁이 만든 썩은 냄새 진동하는 실상이 테러범과 윤영화의 통화 사이에 끼어들며 테러를 멈출 방법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 하다.

현실의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꼬집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동시에 관객에게 마치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듯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내달린다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말은 믿잖아

 

대중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받아들이며 신뢰한다. 시버트, 피터슨, 슈람의 언론의 4대 이론'사회책임이론'에 의하면 언론은 자본이나 권력에 의해 특정 계층의 이해만을 반영해서는 안되며 대중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제공을 해야만 한다. 이 이론을 잘 적용한 언론은 따라서 상당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영리한 대중은 언론에 현혹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이론도 있으나 어느새 대중은 언론을 '사회책임이론' 속 언론으로 믿으며 신뢰를 보냈다. 물론 이런 믿음은 많은 경험을 통해 얕아진 지 오래이긴 하다.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공신력을 지니게 된 매체와 그 안에서 전달자 역할을 한 사람의 입을 통한 정보는 그렇게 대중의 신뢰를 받게 된다.

윤영화(하정우)도 대중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알고 그것을 능숙하게 보여주고 활용하도록 훈련된 앵커다. 테러범이 그를 통화의 대상으로 지목한 이유로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말은 믿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이미지는 잘 구축되었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 안에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이용하며 부정을 저질러왔다. 영화 내내 관객은 그의 신뢰할만한 이미지가 허상임을 직시하게 된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정보도 작가나 PD, 부장이나 테러 진압 전문가의 도움에 의한 것들이지 그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대중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준 국민의 입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허술한 존재였는지 그 이미지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대중이 미디어를 통해 얻게 되는 정보와 그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에 대해 진정 신뢰할 수 있는지, 우리가 너무 맹신하며 그들에게 이미지를 덧입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한다.

 

 

픽션은 현실을 반영한다

 

그의 뉴스 클로징 멘트인 '낮은 곳의 입장을 대변하는 앵커'는 실제로 그의 초심이었을지언정 현재까지 유지되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비단 언론인뿐만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치인과 그 보좌관들, 경찰청장 등은 모두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찌 보면 테러범이 요구한 단순한 조건만 들어줬어도 사태가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럴 인자들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픽션은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테러범이 등장하는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충분히 그런 소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갖지 못한 자들이 살지 못하는 곳, 억울하게 죽어도 목소리 하나 낼 수 없는 곳, 목소리를 내더라도 어디 하나 들어주지 않고 전달해주지 않는 곳, 부정과 부패를 통해 좋은 자리에 앉았지만 책임은커녕 반성과 사과도 없는 곳, 대중이 입혀준 이미지로 호의호식하면서도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무르는 곳에 우리는 지금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 현실은 이런 픽션에 무궁무진한 소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테러범의 호소에 수긍하며 동질감을 느낀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으로 지목하는 사람들은 테러범이 아니라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세력이다. 테러범에 의해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들이 공격 당할 때 오히려 대리만족까지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영화가 주는 재미가 된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들의 부패한 모습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과 현실에서는 그런 쾌감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슬프고 슬픔을 넘어 공포스럽다. 테러범의 실체나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어서의 어떤 반전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 그 테러범(어쩌면 우리)이 호소하는 현실의 부조리가 어떠한 지경인지 날카롭게 지적한다는 점과 그런 점을 전면에 내세워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탄탄한 구성이 이 영화의 가치를 극대화한다.  

 

 

미디어 이미지의 허상과 착각

 

중반쯤 윤영화가 피가 튄 원고를 수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미지를 보면서 과거의 한 유명한 종군기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걸프전 등 온갖 위험한 전쟁 현장을 취재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피가 묻었을 기사를 쓰고 그것을 전하는 그녀를 보면서 대중은 그녀에 어떤 영웅 정도의 이미지를 입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우리는 목도했다. 그녀가 어느 편에 서서 그들의 (영화 속 테러범이 한 표현을 인용하자면) '개 노릇'을 하는지를 말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피 묻은 원고를 수습하는 앵커의 이미지에서 나는 과거의 그 여기자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미디어 속 인물들의 이미지의 허상과 착각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젠 여자분이신데

 

유행가 가사를 인용하자면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젠 여자분이신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통령은 여자가 아니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확히 2013년 오늘을 다루는 극 속에 등장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조금 김빠지는 설정이었다. 극 속 이미지가 긍정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버락 오바마의 선거 출마 때부터 당선과 재선을 거친 지금까지 (내가 본) 거의 모든 헐리웃 영화 속 대통령이 '흑인'으로 묘사된 것을 생각해봐도 역시 김이 빠진다. 전무했기에, 유일무이 하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은 '여성'인 것이나 '흑인'인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 아니던가. 무엇이 두려웠고 무엇을 우려했을까.

 

 

한정된 공간, 소소한 소품이 제공하는 스릴

 

<더 테러 라이브>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사건과 그에 따른 심리/상황 변화만으로 스릴을 제공하는 면에서 굉장히 탁월하다. 인이어 마이크, 전화, 핸드폰, 그리고 뉴스 데스크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소품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해나가는 것은 그만큼 이 영화의 아이디어가 탁월함을 증명한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스피드> 이후 테러범과의 두뇌싸움과 실시간 긴장감을 주는 영화로서는 가장 신선하게 짜릿함을 주는 작품이 <더 테러 라이브>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롤로그 이후 영화는 마치 TV화면처럼 4:3 비율로 보여진다. 관객이 영화의 설정 그대로 TV화면 속 뉴스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화면비율 설정도 스마트한 선택이었다.

영화 내내 데스크에서 꼼짝 못하면서도 동분서주하는 듯 보이는 하정우가 보여주는 엔딩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카메라를 응시했던 눈빛이 인상 깊게 남았던 것처럼 이 영화 속 엔딩에 담긴 하정우의 눈빛 또한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