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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비포 미드나잇] 멸종되지 않도록 지켜내고 싶은 인류의 유산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그들의 대화(법)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멸종되지 않도록 지켜내고 싶은 인류의 유산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그들의 대화()

 

18년을 이어온 3부작의 마지막은 사랑스럽게 마무리됐다. 달달하거나 로맨틱해서가 아니라 정말 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시 삶의 대화로 복귀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 신화의 나라 그리스에서 그들의 사랑은 화석처럼 굳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처럼 생생하게 출렁이고 있는 현재의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달달함과 로맨틱함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쉼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 빠져 함께 출렁이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영화, 반갑고 사랑스럽다.

 

<비포 미드나잇> '비포 시리즈' 3부작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들의 만남이 담긴 <비포 선라이즈>가 시작이었으니 그 시작이 주는 감흥을 뛰어넘을 순 없겠지만 그 감흥을 18년이 지나서도 잘 간직하고 있어 기대가 무척 컸음에도 전혀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것에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비엔나에서 헤어진 후 9년 만에 파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비포 선셋> 1편과 3편을 잇는 다리 역할로 느껴진다. 1편과 3편은 그들이 각자의 삶 또는 공유하는 삶과 생각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기에 대화의 깊이도 비슷하고 흥미롭다. 반면 2편은 1편에서 헤어졌던 그들이 9년이 지나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는지에 더 관심이 집중된 지라 대화는 조금 심심하다는 인상이 남았다. <비포 선라이즈>의 여운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어쨌거나 둘이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배가 부르게 되는 그림이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러닝타임도 1편과 3편이 각각 100, 108분인데 2편만 79분 정도로 짧다. 이것으로서도 뭔가 브릿지로서 2편을 바라보게 된다.

 

 

 

1편인 <비포 선라이즈>에는 '문명의 이기가 갈수록 인간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줄까' 하는 의문으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기가 발달해도 인간은 늘 그렇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게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냈던 셀린느와 제시. 3편에서 그들이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이 잠든 모습이나 여행의 풍경을 찍고 국적이 다른 커플이 연애를 하면서 스카이프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선 18년 전 그들의 대화가 떠올라 재미있게 바라보게 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던 셀린느는 환경운동을 직업으로 갖게 됐고 갖가지 상상력을 말로 쏟아내던 제시는 작가가 되었다. 둘의 대화는 직업과 삶, 육아문제, 남자와 여자의 삶과 사랑과 관계의 유한성 등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그 사이 농담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실로 끊이지 않는 대화, 부드럽고 풍성한 대화의 정석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애초에 기차 안에서 그리고 거리를 걸으면서 나눴던 대화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 두 사람의 삶은 끊임없는 대화로 촘촘해진다.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오르락 내리락 리드미컬하게 흐르는데 그것은 유쾌함과 즐거움, 사소한 다툼과 토라짐을 순식간에 오간다. 그것을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리얼하게 펼쳐내는 모습은 감탄하게 만든다.

2편을 만들면서부터 감독인 리차드 링클레이터와 함께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한 두 배우는 확실히 무슨 이야기를 어떤 리듬으로 전개할지를 파악하고 있고 그것을 완벽하게 내면화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이것이 픽션인지 다큐멘터리인지 헛갈릴 지경이 될 만큼 그들의 연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실제처럼 보인다. 기차에서 우연한 만남이 시작된다는 1편이나 파리의 서점에서 재회한다는 2편은 어느 정도 픽션이 가질 수 있는 판타지, 허구의 느낌이 가미됐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 담겨있고 사랑, 연애가 로맨틱함만으로 시작되거나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는 3편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면모를 담았음이 느껴진다.

 

둘의 대화를 원신원컷으로 담거나 롱테이크로 실제 시간 그대로 담아낸 것에 감탄하게 만든다. 처음 공항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화주제를 바꾸면서 이어지다가 아이들이 깨면서 자연스레 컷이 되는 그 시퀀스에서부터 이들의 찰떡 같은 호흡에 넉다운이 된다.  

얼마 전 TV에서 방영되기도 했던 영국 다큐 <UP> 시리즈는 1964년에 7살이었던 아이들을 촬영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7년 단위로 동일인들의 삶을 담아 보여주고 있다.

<비포 미드나잇> 9년 단위로 셀린느와 제시를 보여주는 <비포>시리즈의 픽션이지만 실제로 9년 단위로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를 담아내기도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작가이면서 텍사스 출신인 에단 호크의 모습이나 실제로 음악 활동을 하는 줄리 델피의 모습이 담겨진 것도 그러하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가 쏙쏙 귀와 마음에 꽂히는 느낌이 제대로 전달된다

 

 

셀린느와 제시는 관객을 그들 대화의 온전한 청자로 만들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 대화 속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에 나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고 대답하고픈 욕구가 들게 만든다.

깊이 있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대화는 깊이 있는 소통으로 읽힌다. 침묵이 이해와 포용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관계에서 침묵보다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침묵 대신 모든 순간 서로의 의견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며 옥신각신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깊은 소통의 과정으로 보인다. 커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애초에 남성과 여성은, 아니 각각의 인간은 피차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 아닌가. 그 누구도 같을 수 없는 이상 완벽한 생각의 합일을 꿈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차이를 애초에 인정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서로 농담과 진담을 섞어가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셀린느와 제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화법, 소통법을 보자면 그것이 그들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진정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영화의 중반부에 여러 세대와 국적의 커플들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셀린느와 제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게 한 시퀀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이들의 모습을 더 안 보여줘도 관객들이 실컷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까. 그것은 3부작의 엔딩에 어울리는 이 영화의 표식으로 보인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도, 해가 지기 전에도,  그리고 밤이 깊어지기 전에도 그렇게 대화를 나눴고 소통을 했다. 그들의 대화는 사랑을 완성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멸종되지 않도록 지켜내고 싶은 인류의 유산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그들의 대화()이 아닐 수 없다.  

 

 

올해 본 영화 중에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이 늘 간직하면서 우울할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영화였다면 <비포 미드나잇>은 살면서 고민이 많아질 때 아무 생각 없이 꺼내서 보고 나면 뭔가 홀가분하게 고민이 풀려버릴 것 같은 영화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