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월플라워] 청춘의 벽을 함께 깨고 올라오는 '줄탁동시'의 기운이 충만한

 

월플라워(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청춘의 벽을 함께 깨고 올라오는 '줄탁동시'의 기운이 충만한

 

청춘은 에너지가 넘친다. 그 에너지가 발산되는 순간은 눈부시게 찬란하다. 그 순간의 찬란함을 눈치 못 채는 것은 오로지 그 청춘, 자신뿐일 것이다. 찬란한 청춘은 그늘도 짙다. 자체가 빛을 발하는 때이니만큼 그늘이 더욱 깊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청춘은 스스로의 빛은 눈치 못 채고 그늘만을 응시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늘은 청춘의 빛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청춘의 그늘은 더욱 안쓰럽다. 그러니 청춘이 스스로의 찬란한 가치를 알아채고 그 빛으로 그늘을 대체하게 할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자존감을 갖게 하는 도움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만 사랑 받는다.(We accept the love we think we deserve.)"

'왜 괜찮은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과 사귀는 걸까요?'라고 묻는 찰리(로건 레먼)에게 앤더슨 선생님(폴 러드)이 해주는 대답이다. 자존감이 결국 사랑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존감이란 스스로 찾아낼 수도 있지만 타인의 인정을 통해 더욱 높아진다. 

영화의 제목에 등장한 '월 플라워'는 파티에서 누구의 제안도 받지 못하고 혼자 우두커니 벽에 기대어 서있는 인기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월 플라워'의 의미도 누군가의 도움을 요구한다. 벽에 기대어 있더라도 파티에 가서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는지 눈을 굴리는 것까지가 나의 노력이라면 그런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 춤을 제안하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의 영역이다. 그렇게 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손길을 통해 나의 그늘은 걷히고 찬란한 청춘의 한때가 시작되는 것이다.

 

 

'줄탁동시(啄同)'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은 밖에서 알을 쪼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사제지간의 인연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줄탁동시'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청춘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표현 같다. 내 앞의 벽을 깨려는 나의 의지와 나를 알아봐주고 함께 벽을 깨주는 사람들이 만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것이다. <월 플라워>는 서로의 존재와 가치를 알아봐주며 청춘의 벽을 함께 깨고 올라오는 '줄탁동시'의 에너지가 충만한 영화다.  

이제 막 고등학생 시절을 시작할 찰리(로건 레먼)는 앞날이 끔찍하다. 유일한 친구는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나마 학교에서 당할 따돌림과 괴롭힘을 터놓고 위안 삼을 상대도 사라진 것이다. 이런 마음을 알리 없는 가족들에게 진심을 비치기도 어렵다. 어릴 적 의지했던 이모의 죽음 이후 찰리에겐 마음의 벽이 하나 더 생긴 셈인데, 이모와의 어떤 '사건'은 악몽처럼 그를 괴롭힌다. 그런 찰리가 샘(엠마 왓슨)과 패트릭(이즈라 밀러)을 알게 된 건 행운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파티에서 흥겹게 놀고 '록키 호러 쇼' 공연도 하는 그 친구들은 '월 플라워'인 찰리의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다. 하지만 샘과 패트릭 역시 상처가 있다. 샘은 자존감이 약하다. 자신의 가치를 몰라주는 이기적인 남자친구에 휘둘린다. 10대 초기부터 시작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패트릭은 당당해 보이는 파티의 리더 같지만 미식축구부 주장과 비밀스런 동성애 관계로 처참한 끝을 맛본다. 그러니 오직 찰리만이 '월 플라워'인 것은 아니다. 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은 샘과 패트릭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알아봐주고 보듬어준 '도움'의 존재가 되었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행운이다. 샘과 패트릭 그리고 찰리는 서로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준 친구들이었다. 찰리의 가치를 알아봐준 앤더슨 선생님(폴 러드), 깨닫지 못했을 뿐 늘 큰 버팀목이었던 가족, 깊은 눈으로 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신과 의사 버튼(조앤 큐잭) 역시 찰리를 알아봐주는 존재들이다. 찰리와 샘, 패트릭 모두 험난한 10대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을 알아주고 보듬는 사람들 역시 한 켠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준다.

그 때, 그 순간에 느꼈던 고민의 크기는 바로 그 때에 가장 거대하다. 그 강렬한 순간을 마치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읽어주고 알아주는 친구, 가족,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행운이 되어준다면 삶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팔목을 긋고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청춘들에게 절실한 것도 이런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모두 히어로가 될 수 있어, 오직 하루뿐이라고 해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서로 기대고 의지할 든든한 벽이 되어준 사람들을 통해 (영화에 흐르는 데이빗 보위의 'Heroes' 가사처럼) 우린 모두 세상에 가치 있는 영웅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오직 하루뿐이라고 나는 알 수 있다.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는 어떤 순간순간마다 함께 빛나 줄 것임을 말이다.

 

<스탠 바이 미>

 

샘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찰리에게 타자기를 선물하며 '우리의 이야기를 써줘'라고 말한다. 찰리가 훗날 진짜 작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을 쓰는 찰리를 화자로 내세운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영화 <스탠 바이 미>를 떠올리게 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 <The body>를 영화로 만든 <스탠 바이 미>10대 초반의 네 소년이 시체를 찾겠다며 떠나는 12일의 여정을 담았다. 이 영화(와 원작소설)의 화자는 훗날 작가가 된 고디(리차드 드레이퍼스)이다. 이 영화 역시 십대 때 나를 이해하고 나를 지지해주는 든든한 친구를 갖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소년 고디(윌 휘튼)는 죽은 형 데니(존 큐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자신에겐 영웅 같았던, 부모님에겐 더욱 큰 존재였던 형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고디는 죽어야 할 사람은 형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어야 했다는 생각에 빠진다. 부모님에게도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토로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이 어린 소년의 상처는 함께 길을 떠난 친구 크리스(리버 피닉스)에 의해 보듬어진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 친구의 말은 고디를 한 뼘 더 자라게 해준다. 영화의 끝에 작가가 된 고디(리차드 드레이퍼스)는 그 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긴다. '그 후로 다시는 12살 그 때와 같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십대 청춘의 시기에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고 자존감을 갖게 해줬던 친구의 가치는 <스탠 바이 미>에서 그렇게 표현됐다.  

 

<월 플라워>를 보면서, 또 자연스레 <스탠 바이 미>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금 나의 친구들, 가족,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꺼내보게 됐다. 완성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충돌하고 다녔던 나를 이해해줬던 사람들, 내 방식을 지켜봐 줬던 사람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줬던 친구들, 가족, 선생님들. 고맙다, 고마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