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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전설의 주먹] 대한민국 40대 남성을 옥타곤 위에 올리며 하고 싶었을 이야기

 

전설의 주먹

대한민국 40대 남성을 옥타곤 위에 올리며

하고 싶었을 이야기*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

 

고교시절 주먹으로 끗발이 있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격투기 무대인 옥타곤 위에 올리는 TV '전설의 주먹'이 화려하게 시작된다. 고교시절 주먹깨나 썼다던 이들이라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전문 격투기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맥없이 초라하게 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날렵한 몸과 강렬한 눈빛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프로 선수들을 제압하는 이들이 등장하면서 프로그램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고교시절에 의리와 우정, 그 시절의 치기로 뭉쳤던 70년생 남자들은 이제 40대 초반의 가장이 되어 다시 옥타곤 위에서 격전을 벌이게 된다. 주먹으로 주름잡던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게 된 사연과 현재 한 가정의 가장들로서 짊어진 무게가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관객은 옥타곤 위에 선 40대 남자들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격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우석 스타일로 투박하게 직진하는 남성판 <써니>

 

고교시절 일대다의 전설적 싸움꾼이었던 '전설의 주먹들'을 소개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만화의 컷이 넘어가는 것처럼 연출되어 이 영화가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강렬한 장면들이 경쾌한 리듬감으로 연결되어 세련된 인상을 준다만 그것은 오프닝 시퀀스에 한해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후 영화는 투박하게 이야기를 툭툭 던지고 간간이 유머를 뒤섞는 '강우석 스타일'을 드러낸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세련됐다는 표현을 붙이기는 어렵다. 장면이나 대사에 멋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연출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 같은 거칠고 투박하게 돌진하는 캐릭터를 그릴 때 더욱 탄력을 받는다.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스스로 제작과 연출을 겸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었던 <미스터 맘마><마누라 죽이기><투캅스>등의 트랜디한 코미디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공공의 적><실미도>같은 투박하지만 강한 이야기를 담는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그의 초기 연출작인 <달콤한 신부들>(농촌총각결혼문제),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청년백수문제),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정치와 언론의 부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교육문제)같이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과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전설의 주먹>에서 국정원 요원을 희화하고 폭행사건에 연루됐던 모 그룹 회장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도 이런 강우석 스타일을 드러내는 데 한 몫 한다.

 

 

현실 속 가장이라는 무게에 발목 잡혀 과거와 시원스레 화해하지도 못하는

40대 남성의 초상

 

153분의 러닝타임에 대해 감독은 어느 한 장면도 들어낼 것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일견 맞다. 어떤 장면도 들어낼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더 추가해야 할 장면이 있어 보이고 에피소드의 경중을 다듬어 재구성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러닝타임보다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이야기의 초점이 뚜렷한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과거 주먹꾼들이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다시 만나 대결을 벌인다는 핵심 컨셉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동창들끼리 옥타곤 위에서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관객으로서 누구의 편에 서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 <주먹이 운다>식의 대결 구도도 예측돼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의 고교시절의 사건들과 현재의 삶들이 시시각각 끼어들다 보니 이야기의 중심이 흔들리고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전설의 주먹'이라는 TV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임덕규(황정민)는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가게 된다. 처음엔 그를 환영하던 동창들은 술에 취해 슬슬 그에 대한 과거의 불만들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요인물인 임덕규, 이상훈(유준상), 신재석(윤제문), 손진호(정웅인)가 겪었던 그 시절의 사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들이 그 사건을 기점으로 소원한 관계가 된 중요한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그들의 관계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약하다. 다시 만난 그들은 그저 길에서 몇 마디, 선수 대기실에서 몇 마디 (어찌 보면 대단히 건조하게) 나누는 게 전부이다. 과거의 감정을 두고 25년이 지난 현재 다시 이야기하는 게 버거울 만큼 현재 각자가 처한 상황이 힘겹고 짊어진 무게가 무겁다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의 그들을 비출 때는 혼자 딸을 키우며 딸을 괴롭히는 날라리들까지 상대해야 하는 아버지와 간 쓸개 빼고 치사함을 견디며 일해야 하는 기러기 아버지의 짐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그래서 그들에겐 오랜만에 만난 동창끼리 그 흔한 소주 한 잔 기울일 여유도 없는 모양이다. 고교시절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들은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인들이고 오히려 당사자들은 그 때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조차 하지 않으니 과거와 현재의 그들은 생판 딴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임덕규(황정민)의 경우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등장하므로 그의 마지막 결정이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나름 명확하다. 하지만 임덕규, 이상훈, 신재석 그리고 손진호의 화해는 영화 저 뒤편에 숨겨져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라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은 너무 쿨한 것이다. <써니>의 누나들처럼 같이 모여 그 때의 춤을 추는 것까지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40대가 된 이들의 관계와 감정을 나누는 방식은 너무 삭막하다. 결국 동창들이 모여 과거의 어떤 앙금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처럼 시작한 영화는 그보다는 현재 가장으로서 짊어진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데 치중하며 급히 마무리 짓는다. 그래서 10대의 그들과 40대의 그들이 동떨어진 것 같은 인상, 분명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결선이 촘촘하지 못한 인상을 남긴다. 거친 남성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전형적이더라도) 뜨거운 무언가가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가 선택한 엔딩씬도 그런 면에서 조금 갸우뚱해진다. 전설의 주먹들인 40대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모아 주먹 대결을 벌인다는 강렬한 컨셉으로 시작된 영화는 딸과의 절묘한 화해와 가족애를 다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엔딩으로 정했다. 이 엔딩은 비슷한 느낌의 영화 <주먹이 운다> <써니>와 결과적으로 비슷해질 수 있는 함정을 교묘하게 벗어나는 해법이기도 하나 핵심적인 이야기의 힘을 빠지게 하고 영화의 초점이 분산되게 하는 약점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엔딩씬은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정도는 아니지만) 다음으로 맥 빠지는 엔딩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욕심만큼 구성이 탄탄하지 않고 정돈이 덜 된 인상을 준다.

 

 

40대 남성들에게 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콘텐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주먹>은 많은 관객들, 특히 영화의 주인공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큰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고 그 외 연령층과 여성관객들에게도 환영 받을 만하다. <써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퍽퍽한 삶을 조명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레 감정이입이 된다. <써니>가 여성들의 단체관람을 이끌 만큼 공감대를 형성했고 영화 관람 후 커피숍에 앉아 수다를 떨게 하는 콘텐츠였다면 <전설의 주먹>은 남성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왜 남자들의 삶은 어른이 되어서도 피 터지게 싸워야 하는 것인지 토로하거나 자신들의 과거 '주먹'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소주잔을 기울이게 할만한 콘텐츠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차이 때문인지 주요 캐릭터 중 다수가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서 사회적으로 뒤에 위치한 인물들로 그려진 <써니>와 달리 <전설의 주먹>은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끊임없이 격투하는 삶의 주체로서 살아야 하는 남성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이리저리 치이고 퍽퍽하며 서글픈 삶을 살고 있는 40대 남성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측은해 보이는 것이 <전설의 주먹> 40대 남성들이다.     

개인적으로도 70년생 형들에 대한 어떤 동경이 있다. 초등학생일 때 동네 큰 길에서 양쪽으로 갈라선 고등학생 형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딱 70년생 형들이었다.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보면서 함께 동경하고 흉내 냈었지만 그 모든 조건에서 더 주윤발의 모습에 가까이 있었던 형들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기억이다. 철없던 때의 실없는 동경이었지만 영화 <전설의 주먹>을 보면서도 그랬고 <써니>를 보면서도 그 시절의 묘사에 대해 끄덕거릴 수 있는 세대가 그런 콘텐츠를 보면서 느끼는 공감, 감동은 충분히 지갑을 열게 할 만하다.

 

 

싱크로율 낮은 배우들의 조합이 오히려 퍽퍽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기도

 

주요 인물인 임덕규(황정민/박정민), 이상훈(유준상/구원), 신재석(윤제문/박두식), 손진호(정웅인/이정혁) 10대와 40대를 각기 다른 배우가 연기하므로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써니>가 이른바 '싱크로율 100%'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닮은 외모의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보는 재미를 줬다면 <전설의 주먹>은 싱크로율 50%도 안 될 것 같은 배우들을 등장시켜 나름 신선한 재미를 준다. 배가 나오고 머리는 백발이 된 40, 몸은 여전히 날렵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얼굴의 40대가 10대 때와 달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싱크로율이 떨어지는 10대와 40대의 대비는 그들이 보냈을 퍽퍽한 삶의 무게를 도드라지게 하는 (예상치 못한) 효과로 봐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