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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웜 바디스] 기성의 논리에 저항하는 현재 청춘들을 향한 영화의 선상에

 

 

 

달라도 괜찮아_변화하는 영화들

외부인의 침입과 이종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심을 드러냈던 영화가 장르영화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에이리언>이나 <인디펜던스 데이> 등 외계생명체의 침입을 다룬 영화는 이른바 '제노포비아'를 담은 영화로 명맥을 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영화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외부인에 대한 이해의 노력이 보이고 이상일지언정 이종과의 조화를 꿈꾸는 모습들을 담고 있다. 한술 더 떠 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묘사한다. <디스트릭트9>은 기존 외계 침공의 영화들을 확실히 비틀어 화제가 됐었다. 이른바 'Mtv 영화'로 젊은 층을 타겟으로 만들어졌던 <스텝업><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등은 서로 다른 클래스의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후예들이었고 그 흐름은 <트와일라잇>시리즈를 지나 이제 <웜 바디스>에 이른 것이다. 이는 천편일률적으로 흐를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변화를 꾀해 새로운 진로를 터보겠다는 계획의 결과이기도 하겠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욕망이 다각도로 부작용을 일으키는 현대사회의 반영이기도 하겠다.

 

 

기성세대를 향한 열변의 한 방식_상업적 성공의 열쇠

한편으로 이런 새로운 흐름 속에 있는 영화들은 기성세대가 정의라고 부르짖고 후세에 강요하는 진리가 정의가 아닐 수 있음을 먼저 깨닫고 그 변화를 수용할 유연성을 지닌 젊은 세대의 열변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그것이 소설이든 영화이든 판타지의 옷을 입은 창작물을 만들어 호응할 수 있는 동조자와 만나고 같은 이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며 마음 속으로 연대하기에 이르는 공간으로서 월드와이드웹과 극장이 존재한다. 그들만의 감각으로 변화를 감지해낸 젊은 세대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그들의 섬광처럼 번뜩이는 레이더로 찾아낸 '정의'를 무기로 기성세대와 당당하게 맞서는 짜릿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런 '니즈'를 포착한 예술가들과 투자자들은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냈고 젊은이들의 지지를 얻게 됐다. 소비력을 지닌 젊은 세대의 주머니는 점점 쉽게 열리고 그것을 겨냥한 예술가들과 투자자들의 시도들이 다각화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청춘들은 피와 땀을 흘리며 거리에 나가 구호를 외치거나 돌을 던지는 방식이 아닌 어두운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키득거리는 방식으로 마음 속 그들의 이상을 나누고 연대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문화상품으로서 공급자와 소비자를 만족시킨다.

 

성조기를 거부하는 조짐일수도

외부인에 대한 공포 메시지를 확산시켜 기성과 보수를 견고하게 하고 그 공포를 제거하는 영웅으로서 성조기를 펄럭거림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 번지르르한 포장을 덧댔던 헐리웃 영화들. 하지만 요즘 만들어지는 청춘의 혈기가 넘치는 영화들은 이 공식의 고리타분함에 일침을 가한다. 외계인이든 이종이든 알고 보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화합의 가능성을 열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기본이며 그 흔한 성조기 펄럭거림도 없다. 헐리웃 영화의 시장이 단순히 북미에 그치지 않기에 외국 시장에서 거부감 없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는 요소로서의 약삭빠름일 수도 있으나 정보의 장벽이 없고 영웅의 짐을 버거워하는 세대의 변화의 조짐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물론 여전히 미국만세의 영웅담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성의 논리에 저항하고 휴머니즘을 외치는 청춘의 따뜻한 심장

<웜 바디스>는 이런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최근에 도착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좀비 R(니콜라스 홀트)과 인간 줄리(테레사 팔머)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게 되어 이종간의 조화를 부르짖는 커플이 된다. 좀비와 싸우는 군대의 장군인 줄리의 아버지 그리지오(존 말코비치)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를 상징한다.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고 미국의 도시라는 인상은 있으나 그 어디에도 성조기는 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이 죽은 좀비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변화되게 만들 수 있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인간은 젊은이들이다. 그걸 수용하지 못하고 끝내 총을 쏴버리는 존재는 그 젊은이들의 부모이다. 끝내 피를 보고 나서야 진실을 깨달아버리는 기성세대의 모습과 휴머니즘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서 젊은이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분명 젊은이들이 환호할만한 요소로 똘똘 뭉쳐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적인 좀비이면서도 R은 조금 다르다. 뜯어먹은 인간의 뇌를 통해 기억이 이식된 그는 시체 '좀비'인 주제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느낀다. 그르렁 거리는 좀비들과 달리 말까지 하는 R은 사실 죽은 좀비가 다시 살아있는 인간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이다. 죽어 굳어버린 '시체들'의 심장이 다시 온기로 살아나 '웜 바디스'가 되어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 어떤 논리적 근거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그전에 원작소설)의 설정 자체가 판타지이니 내용 설명에 논리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까. 논리적 설명이 안 되는 판타지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좀비들이 변화할 수 있는 치료제가 바로 인간의 사랑, 관심이라는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은 (감상적일지언정) 눈물 나게 아름답다. 세상을 구원할 것이 성조기를 펄럭이는 미국 영웅인 것보단 인간의 사랑, 휴머니즘인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물론 좀비 중에서도 '가능성 없는' 보니들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들과 싸우는 장면은 인간에게 적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비춘다. '온 세상이 모두 하나'가 되는 지나친 이상은 아니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흔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좀비와 인간, 죽은 몸과 산 몸의 구분 조건이 '사랑을 느끼는 심장'이라는 것은 동시에 살아있는 우리,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살아있을지언정 사랑은 없는, 메마른 심장을 지닌 인간을 진정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심장을 지닌 인간이 좀비를 배척하고 그들의 머리에 총을 겨눌 수 있을까를 질문해보게 만든다. 이에 부끄럽다면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장착하고 인간으로 거듭나라고 말하는 듯 하다.     

 

단순한 플롯, 경쾌한 이야기로 뮤지컬로서도 적격인 콘텐츠

<웜 바디스>의 플롯은 사실 너무나도 단순하다. 모든 캐릭터들을 이해하기 위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장면장면 적절하게 귀를 즐겁게 만드는 음악들과 간간이 터지는 유머는 영화를 경쾌하게 만들고 즐겁게 보게 만든다. 그래서 7페이지 분량의 인터넷 글에서 단행본 소설이 되었고 영화로 완성된 이 이야기는 뮤지컬로 무대에서 보기에도 적절한 콘텐츠라는 생각이 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좀비 버전이라고 할만한 이 영화, 조만간 뮤지컬로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