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베를린] 한국형 첩보영화의 자주적 지평을 넓히다

 

베를린

한국형 첩보영화의 자주적 지평을 넓히다

 

북한 요원, 국정원 요원, CIA, 모사드, 아랍연맹. 그들은 베를린에 있다. 김정은 체제로 접어들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권력 다툼이 거세지고 그것은 국제정세에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관계된 국가들의 정보원들은 이에 예의주시하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베를린에 모여있다. 그 안에서 각자의 목적이 충돌한다. 유혈낭자 총격과 몸싸움 끝에도 그들은 베를린에 남아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그려라'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의 정보요원과 비밀요원을 중심으로 그들과 정보, 무기, 자금 등으로 얽힌 각국의 요원들과의 먹이사슬관계를 그린다. 이기적인 내부 시스템과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적 난립을 틈탄 권력다툼, 무기밀매를 통한 자금의 순환과 국제적 입지 마련 등이 배경이 되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원 사이의 피 끓는 의리, 사상의 함정을 벗어나려는 사랑, 이념을 초월한 인간애가 그 안에 담겨있다. 크게는 국가와 이념의 문제, 정치와 (검은)경제의 문제를 다루면서 세부적으로는 결국 인간의 관계를 다루며 영화는 숲과 나무를 골고루 비춘다.

 

숲과 나무를 오가는 그림을 채우는 것은 치밀하게 짜여진 액션과 각자 아우라를 뿜어내는 배우들의 연기다. 주변 집기를 활용한 생활형 액션과 총기의 화염보다도 화려하게 타오르는 맨손 액션은 <베를린>의 특기다. 이미 <>시리즈의 제이슨 본도 전화기나 펜 등을 활용한 일명 '생활형 액션'을 선보였으나 그것이 <베를린>의 액션 연출을 폄하할 이유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 속에서 설득력 있게 펼쳐지는 생활형 액션은 힘이 있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적과의 싸움에서 인물이 가위나 캔을 들고 싸우는 것이나 고층 아파트에서 추락하며 전선에 몸이 묶여 휩쓸리며 추락하는 공중액션은 충분히 영화의 상황에 녹아있기에 인상에 남는다.

액션의 합과 이야기의 합 모두를 중요하게 여기는 류승완 감독의 스타일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러 인물들의 복합적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내러티브는 <부당거래>의 연장선에 있고 세련되고 몰입도가 강한 대규모 액션에 대한 욕심은 (특히)<아라한 장풍 대작전> 이후 가장 공들인 액션 연출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정두홍 무술감독팀은 그 어느 때보다 고생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와 액션의 합을 제대로 재현해내는 배우들의 역할이 매우 인상적이다. 한석규의 특출한 발음과 발성, 유연한 연기는 여전히 빛났고 하정우는 진정 이 영화에 '올인'하고 있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류승범의 경우 가장 영어 연기가 자연스럽다고 느껴졌고 탁월하게 장면 빼앗기를 해냈다. 전지현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욱 깊어진 얼굴이 보였다. 이 네 배우는 각자의 장면에서 아우라를 뿜어내며 영화를 채우고 있으므로 보는 내내 연기자에게 '살아있네'를 외치고 싶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대체할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빈틈없이 제 역할을 해냈고 이것은 연출의 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타고난 복이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이렇게 채워진 영화의 맛이 개운한 것은 이것이 한국형 첩보영화의 지평을 넓힌 결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남과 북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픽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갖춘 충무로에서 남과 북의 현재를 소재로 잘 만들어낸 상업영화라는 말이다. 바로 떠오르는 예로 1999년작 <쉬리>를 들 수 있겠다. 남과 북의 정보원과 비밀요원을 주인공으로 사랑 이야기를 녹여낸 작품이다. <간첩 리철진><이중간첩><풍산개><의형제><간첩> 등 최근까지 각각 코미디, 드라마, 에스피오나지를 넘나들며 남과 북의 관계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있으나 직접적으로 <쉬리> <베를린>과 가장 근접한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첩보라는 소재와 함께 대규모 액션 활극을 담은 상업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그 기준으로라면 <쉬리> 이후 14년 만에 남북관계를 중심 소재로 삼은 에스피오나지 또는 첩보영화가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남과 북의 관계가 진행되는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기에 이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조리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베를린> 관람 전 우연하게 3월 개봉 예정인 어떤 헐리웃 영화의 예고편을 봤다.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백악관을 공격해서 워싱턴D.C.가 초토화되고 그 안에서 북한의 테러리스트를 처단할 영웅이 등장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빈 라덴 암살과정을 다룬 영화까지 나온 지경에 이제 소재화할 공공의 적으로서 북한의 테러리스트를 가져왔다는 인상은 유쾌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그 영화의 내용을 보면 영화 속 테러리스트를 '코리안 테러리스트'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이유였지만 밑도 끝도 없이 헐리웃이 정해서 전세계 관객들에게 주입하는 영화 속 공공의 적으로 북한이 등장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북한을 소재로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기에 우리보다 헐리웃이 적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미국화, 헐리웃화 되어 전세계의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는 대상으로서 북한은 온당한가.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헐리웃산 액션영화와 에스피오나지 장르를 표방한 듯한 <베를린>은 장르가 다르긴 하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해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단순히 만들기 쉬운 공공의 적으로서 북한을 차용하는 영화와 북한과 국제관계의 현실 상황을 반영하며 진지하게 작품 속에 녹여낸 영화로서 비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기준으로 하자면 헐리웃 영화의 접근보다는 <베를린>의 접근이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남북의 관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제대로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베를린>이랄 수 있겠고 이에 '한국형 첩보영화의 자주적 지평을 넓혔다'고 표현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쉬리>와 비교했을 때, 아우르는 대상도 남과 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 3국의 입장을 첨가하고 그 배경도 제 3국이기에 더 넓은 틀을 지녔다고도 여겨진다. 그렇기에 <쉬리>를 기점으로 한국형 첩보영화에 자주성을 이어나갔고 그 지평을 더 넓힌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007>시리즈 등에 의해 모티브가 제공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 소재를 그 소재의 주인다운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주체는 (단언하긴 조심스럽지만) 충무로가 가장 적합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1/3 지점부터 영화를 이끄는 힘은 진실을 알아버린 표종성(하정우)의 분투에서 나온다. 그것을 통해 표종성과 정진수(한석규), 동명수(류승범)가 모두 엮여 대립하게 되고 표종성과 아내 련정희(전지현)의 감정도 그 흐름을 타고 흐른다. 그렇기에 표종성과 련정희의 감정도 영화의 끝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조금 길게 늘어지는 감이 있다. 액션과 감정이라는 상충하는 개념이 부드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일 테다. <쉬리>에 비해보자면 <베를린>은 남녀의 감정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이 부분은 더하자니 넘치고 덜하자니 아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결국 표종성이 '블라디보스토크, 원 웨이'를 외치게 하기까지 휘몰아쳤던 그 모든 액션과 함께 어우러진 중요한 감정의 축이었기에 수긍해야만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