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7번방의 선물] 철조망에 걸린 풍선 같은 현실

 

7번방의 선물

철조망에 걸린 풍선 같은 현실

 

1997년 초, 지적 장애를 지닌 용구(류승룡)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 예승(갈소원)과 살아간다. 예승의 입학 선물로 사주려던 '세일러문 책가방' 때문에 용구는 어린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고 유죄로 살인 선고를 받아 수감된다. 용구의 사정을 알게 된 교도소 수감생들은 예승을 몰래 교도소에 들여 용구와 지낼 수 있도록 돕는다. 범죄 피해로 아들을 잃은 상처를 지닌 교도소장(정진영)도 차츰 용구의 무고함을 알게 되며 재심을 청구하고 탄원서를 제출하며 도움을 준다.

세월이 지나 사법연수원 졸업을 앞둔 예승(박신혜)은 모의재판을 통해 아버지가 누명을 썼던 그 사건을 다루고 변호사로 서게 된다. 이 자리에는 예전 아버지를 도왔던 교도소 수감생들과 교도소장도 증인으로 참석한다. 용구는 자신의 무고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7번방의 선물>은 억울하게 살인죄를 쓴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야기를 코미디와 판타지를 조합해 만든 영화다. 그 조합은 관객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코미디와 판타지 속에 담긴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묘사는 관객을 먹먹하게 만든다.

티저 예고편만 봤을 때는 배우 류승룡의 연기 변신을 앞세운 코미디로 인식됐었다. 그런데 본 영화에서 그런 코미디 요소는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류승룡의 연기 변신만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예승을 연기한 아역배우 갈소원의 맑은 모습과 용구와 같이 생활하는 수감자들의 연기가 조화롭게 보인다. 7번방의 수감생으로 등장하는 박원상, 오달수, 김정태, 정만식, 김기천 등 조연들의 연기가 좋았던 것은 이 배우들이 여러 영화에서 보여줬던 역할 안에서 소소한 변형을 가하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이다. 가령 변호사 연기가 더 익숙한 배우 박원상은 사기전과자로 이 7번방에 등장하는데 그 캐릭터 안에도 변호사 역할에서 보였던 '분석적인' 모습을 담아 재미를 안겨준다. 여러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며 말투까지 똑같이 연기하는 몇몇 조연배우들을 질리도록 보면서 배우의 폭이나 캐릭터의 다양성이 이렇게도 빈약한가 싶은 때도 있었으나 이 영화 속 조연들은 과하지 않게 개성을 드러내며 조화를 이뤄 보기 좋았다.

 

 

성인이 된 예승이 바라보는 교도소 입구 전선에 걸린 노란 풍선과 과거의 어린 예승과 아버지 용구가 올라탄 철조망에 걸린 기구의 이미지는 영화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다.

이는 영화가 시종 판타지로 점철되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아버지가 수감된 교도소에 몰래 들어와 생활을 하게 되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받아들이는 교도소장과 주변인들의 묘사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다. 예승과 용구가 탈 기구를 만들고 죄수들이 협력하여 하늘로 날린다는 설정도 판타지다. 사법연수원 졸업을 앞둔 예승이 참여한 모의재판의 이야기도 결국 이 모든 판타지를 큰 틀에서 감싸는 역할을 한다. 한편 그런 판타지의 연속에서도 영화는 냉혹한 현실을 담아낸다. 사회적 지위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과 부패한 사법기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틀 안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의 벽이 가슴 아프게 그려진다. 희망을 담은 풍선과 기구가 끝없이 날아오르지 못하고 전선과 철조망에 걸려 멈춰버리는 이미지는 영화를 가득 채운 판타지가 현실적인 요소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현실에 묶여 날개를 펴지 못하는 판타지는 그런 이유 때문에 펑펑 흘러내릴 뻔한 눈물을 삼키게 만든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 자명하지만 스스로 항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버지와 그를 돕는 사람들의 온정,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 그리고 끝내 세상의 협박으로부터 딸을 지켜내기 위한 아버지의 절규는 '최루성'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오르는 눈물을 흘려내지 못하고 삼키게 된다. 펑펑 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입장으로 모의재판에 참여한 예승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내기 위해 눈물의 변론을 펼친다. 하지만 결국 이는 '모의재판'에 불과함을 깨닫는 순간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 16년이 지나 모의재판을 통해서라도 무죄를 인정받은 것은 감동적인 요소이고 그것이 현실에 환기를 제공했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과거에 용구의 삶을 비극으로 만든 원인 제공자들은 16년 후에는 자취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한마디 사과도 표출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영화는 전선에 묶인 채 날아가지 못하는 풍선처럼 여전히 현실의 덫에 걸린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펑펑 울어 해소하고 끝내서는 안될 것마냥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깨문 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각오를 하게 만든다. 그것은 비단 영화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기대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돌부리에 걸린 듯한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마음 속으로 투영됐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