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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르다

나는 입 안의 살과 같다

 

나는 입 안의 살과 같다

언제부턴가 입병이 자주 난다. 여기서 입병이란 입안이 헐거나 목구멍 쪽이 쉽게 부어 침 삼킬 때조차도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략 2009년부터 이런 증상이 심해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막 시작했었다. 나이 제한이 있는 워킹홀리데이의 막차를 집어 타고도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캐나다로 향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봐도 살짝 미쳤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시작된 타지에서의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다. 혼자 살아가며 먹고 살아갈 것들을 다 챙기다 보니 음식이고 뭐고 처음부터 딱딱 맞아 떨어질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신토불이라는데. 그래선지 몸이 어김없이 반응을 했다. 토론토에 도착한지 1주일 지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밥도 못 만들 만큼 감기몸살이 크게 났고 그 끝 무렵부터 입병이 시작됐다. 이걸 어떻게 할지 몰라 막연히 '오라메디'에 대한 아쉬움만 갖고 있다가 현지의 누군가가 'Listerine'이라는 구강청결제가 그런 데 효과가 있다고 하여 마트에서 대용량으로 사다 놓고 수시로 입안을 헹궜던 경험이 있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수시로 내 입은 그 'Listerine'을 불렀다. 고향 떠나면 몸이 제대로 비정상으로 도는지 급기야 나는 자면서도 내 치아를 통제하지 못해 입술 안쪽을 깨물어버리는 '몽유치아'를 경험하기도 했고 뭐 맛난 것이라고 허겁지겁 먹다가 입술을 깨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약사에게 증상을 설명하고 '캐나다산 오라메디'같은 연고를 처방 받기도 했다. 그 연고는 바른 후 미친 듯 쓰라린 통증이 동반됐지만 그 고통만큼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아서 마치 마조히스트라도 되는 냥 상처에 그 연고를 바르고 느껴지는 쓰라림을 즐기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런 입병이 쌀쌀해진 계절이 찾아오니 어김없이 재방문해주셨는데, 이번 방문은 제법 강력해서 보통 1주일이면 고생했다며 떠날 법도 한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다 되어가도록 낫지를 않고 있다. 물 건너 가져온 그 연고도 개봉한지 오래돼 그런지 약효를 발휘하지 못했고 포털 지식인이 알려준 방법을 따르고자 마치 곰돌이 푸가 된 것마냥 꿀을 상처에 처바르고 그 단맛을 음미하며 입을 오물딱 거리기도 했다. 꿀 덕분인지, 아니면 그만큼 시간이 지나서인지 상처가 조금 아무는가 싶은데 그러다가도 다시금 쓰라린 증상이 느껴지곤 한다. 입을 하마처럼 벌리고 거울을 보니 새살이 조금씩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게 또 불편한 것이 새살이 올라오는 느낌마저 내 입과 혀가 감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도 삼키려고 하면 그 새로 올라온 살의 얇은 각질이 한층 벗겨져 음식물과 함께 입천장을 훑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물을 마실 때도 정체 모를 건더기가 함께 넘어가는 것 같은 불쾌감을 유발한다. 침도 삼키지 않을 수는 없으니 완전 건조 방비 상태로 둘 수 없는 입안인지라 이런 예민한 입안을 안고 살아가는 자의 숙명이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상처가 나도, 그게 아물면서 새살이 나도 나의 감각은 나를 편하게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이게 성장통인가 싶다는

눈길에 돌아다녀선지 집에 돌아와 노인네처럼 뜨끈한 아랫목에 가만 앉아 책을 보는데 느닷없이 무릎께가 아파온다.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성장통인가?'. 이 나이에 무릎 쑤신 것을 두고 관절염이라고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성장통이라고 생각하는 건 노인네 처녀 보고 가슴 설레는 것마냥 주책 아니면 노망이다. 그래 노망이다. ''자를 붙여도 서러울 것 없는 나이다. 그래도 나는 그걸 성장통이라고 여기며 심지어 당장 뛰어나가 우유 1리터를 벌컥벌컥 마셔버려야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지경이다. 안다, 철딱서니가 없어도 제대로 없다.

사실 나는 무릎에 한이 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지금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그 땐 워낙 반 전체가 단체 기합이란 걸 많이 받았었기에 그런 일상 중 일부였던 것 같다. 그 날도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셨던 체육 선생님은 방과 후 우리 반 모두를 운동장으로 집합시킨 후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게 시키셨다. 뭘 잘못 했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선생님이 시키시니 '잘 해야지'라고 생각할 만큼 나도 참 답 안 나오는 모범생이었다. 그렇게 단체 기합도 성실하게 받은 후 하교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무릎에 통증이 왔다. 걸을 때도 아프고 왼쪽 무릎 아래쪽 뼈가 오른쪽과 달리 살짝 돌출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지나가는 말로 '병원에 가야 하나' 정도가 들려왔지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들의 무릎 통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세대의 부모였다. 나 또한 병원에 가는 걸 제법 두려워했기에 약국에서 파는 소염제나 파스를 사용하며 순간의 통증을 미련하게 견뎠었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성장도 그때쯤 멈췄던 것 같다. 지금의 남부럽지 않게 작은 키는 그 때까지의 결과인 것이다. 원망은 아니지만 그런 기억과 경험은 일종의 결핍으로 남아 나의 조카들이나 지인의 아이들에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유별을 떨게 만들기도 했다. 하여튼 그런 연유로 나는 무릎에 대한 한이 있고 그래서 지금도 이따금 느껴지는 무릎 통증이 아직 희망이 남았다는 사인이 아닐까,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일이 되는 것일까 하는 대책 없는 긍정 또는 낙천증세를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이따금 이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는 때가 있다. 물론 '나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다오' 라는 사인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미친놈, 그 나이에 주책이다. 정신차려'라는 식으로 정색하고 나를 우스개로 만들어버리는 것 일색일 때 나는 실망한다. 실망을 넘어 상처 받는다. 내가 통증을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깊은 속내를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그리 오랜 관계 속에서도 나를 그렇게까지 밖에 대하지 못해주나 하는 서운함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이 누적되면 그런 자리에서의 대화 중 절반 이상을 그냥 술 먹으면서 나누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내 이야기를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나도 네 이야기를 그렇게밖에 더 이상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냔 말이다, 뭐 이런 자연반사랄까. 어쨌든 그건 인간관계가 완벽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풀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나는 그렇기에 내 짝을 찾는 기준으로서 이런 나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염두에 둔다. 내가 이렇게 '농담 코스프레'로 던지는 말도 잘 헤아려주는 사람을 나는 소망한다. 설마 그게 금지되지는 않았겠지만.

   

Last Christmas

볼만한 게 없는데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버릇인지라 오늘도 그리하고 있다가 문득 '홈 데코레이션 어쩌구' 하는 채널에 잠시 멈춰 섰다. 종이나 헝겊, 나무젓가락 같은 소품으로 크리스마스 장식을 야무지게 만드는 디자이너가 설명을 곁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소품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을 해두고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을 초대해 디너 파티를 하거나 그냥 작은 파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보는 내가 다 행복해졌다. 나도 그런 파티를 좋아한다. 토론토에 있을 때 작은 홈 파티에 초대되고 초대해보기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파티 별거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섰다. 내가 여태 이루지 못한 독립을 향한 야무진 꿈을 꾸는 이유 중 하나도 독립하면 지인들 초대해서 이런저런 파티를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름 '싱글들을 위한 파티'를 생각해냈다. 문제는 그 타이틀만 생각해내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는 나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 하고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것으로 충분히 파티가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어떤 식순에 의한 줄줄이 이벤트가 있어야 파티란 말인가. 더욱이 내 주변엔 크리스마스 전날 수면제를 먹고 하루 숙면을 취한 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일어나고 싶어할 정도의 새까만 남자 싱글들이 득시글한 지라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작은 모임의 자리가 나도 살리고 그들도 살리는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침 싱글이자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친구의 집으로 싱글들을 모이게 하는 '벙개문자'를 보냈고 그리하여 6명의 싱글들이 모이게 됐다. 나는 모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었지만 역시나 모인 자들은 나의 생각과는 저 먼 곳에 있었다. 오자마자 싱글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여 모인 군상들의 처량함을 한심스러워하며 함께 모인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뭔가를 하려는 의지는 없고 불렀으면 뭔가를 제시하라는 기대만 있을 뿐이었다. 나의 뜻과 다른 반응에 나는 실망했고 실망을 넘어 상처 받았다. 그 집과 그 인물들을 선택하여 나름 싱글파티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착오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교회에 가서 경건하게 예배 드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원형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지만 그 파티에 대한 나의 착오는 끊임없이 나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 자리에 있었던 싱글들은 여전히 싱글인 채로 남아있으면서 어떤 모임에라도 나올라치면 그 때의 그 파티에 대한 기억을 엄청난 우스개거리로 치장해 술안주로 꺼내 들었다. 요는 그런 파티를 주최한 나에 대한 힐난이다. 싱글이어서 그 모임에 초대됐고 참여했고 아직도 싱글인 스스로에 대한 자조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참 안타까울 뿐이다. 나라면 그런 모임 자체를 최소한 우스개 술안주로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주최자가 아니었더라도 스스로에게 침 뱉는 격 아닐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상대가 선배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대화 소재 없는 심심한 술자리에 '제대로 걸렸다 소재'로 기어이 길어 올려내는 친구들을 보자면 나는 마치 준비해간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던 영화 <피아니스트>의 에리카(이자벨 위뻬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죽일 놈이다'의 심경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입안의 살과 같다. 예민하고 민감하여 과거의 결핍은 아직도 나를 쓰리게 하고 그것을 기껏 긍정으로 승화시키려는 몸짓은 곧바로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나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인들의 반응에 대해 웃어넘기는 가면을 늘 지참하지만 돌아서 곱씹으며 '내가 죄인이다''내가 미련했다' 한탄한다. 그게 덜 자란 피터팬 신드롬일지라도 허황된 꿈일지라도 우스운 몸부림일지라도 나는 그 모든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사람들과 먹더라도 밥을, 마시더라도 술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다고 느껴지는 느낌이 있는 짝을 만나고 싶다. '싶다'에 나는 희망이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