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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데미지] 상처는 그렇게 전염된다

 

데미지

상처는 그렇게 전염된다

 

루이 말 감독의 1992년작 <데미지(Damage)>가 무삭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라는 새로운 치장을 하고 2012년 우리에게 다시 찾아왔다. 1994~5년 경에 이 영화를 국내 개봉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심의 문제로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아들의 연인과 불륜에 빠지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엄청나게 파격적인 묘사가 우리의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상영을 못하게 됐다가  삭제된 버전으로 상영됐던 기억이 있다. 그런 사건들 덕에 <데미지>는 파격적인 불륜을 다룬 엄청 야한 영화로 인식되어졌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따지는 고리타분함 속에 대중에게 작품이 진정으로 평가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던 사건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삭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찾아온 <데미지>를 관람하는 것은 당시 이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던 자가 돌려받은 뒤늦은 자유 같았다.

 

 

영화는 예술적인 감성의 덩어리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상과 배우의 연기를 온전하게 이끄는 음악의 힘이었다. 연출과 촬영을 함께 겸한 루이 말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앵글 위로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의 격정적이고 광기 어린 연기가 펼쳐지는데 그 둘을 리드하는 것은 왠지 음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세 가지 색 시리즈> 등의 음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악감독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낮게 깔린 스모그처럼 서서히 다가와서 강렬한 힘으로 돌진하는 마차처럼 영화의 기운을 이끌었다. 그 음악 위에서 펼쳐지는 영상과 배우의 연기는 마치 격정적인 현대무용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게 만들었다. 더구나 영화는 굉장히 심각한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것을 말로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처음 안나(줄리에 비노쉬)와 스티븐(제레미 아이언스)이 만나는 장면과 둘이 밀회의 약속을 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는 서로 통성명하는 정도 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을 그들의 눈빛과 표정으로 이뤄낸다. 그 절제된 수단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것에 저절로 영화에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몸부림치는 격정이 파국에 이르렀을 때 몰입은 절정에 이르러 진한 먹먹함을 전한다.   

 

영화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전염시키고 그렇게 상처 입은 사람은 번져나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삶과 죽음이 있고 크게 달라지는 것 없이 그렇게 되풀이될 것만 같다.

 

"상처입은 사람은 위험해요.

 그 사람은 살아갈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죠."_안나 바튼의 말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대사는 위의 안나의 말이다. 처음 집으로 찾아온 스티븐에게 하는 이 말은 먼저 상처받은 경험을 지닌 안나가 자신은 물론이요 스티븐에게 하는 일종의 경고다. 그러나 그 경고는 그렇게 내뱉어지고 말 뿐이다.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전염시키고 다시 자기만의 살길로 빠져나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죄책감 내지 미안함을 가진 사람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에게 '데미지'가 된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이끈 것이 자신의 욕망이며 그 욕망을 상대방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할 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죄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죄책감은 있지만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것에 저항해 오히려 본질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친다, 본능적으로.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을 누르지도 자신을 바꾸지도 않는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되풀이된다. 상처를 줄 수 있는 욕망과 심리는 여전히 작용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인생을 망쳐버리는 사람은 또 나온다. 그러나 그 데미지를 입힌 사람은 살아낸다. 이미 상처받은 사람은 살아갈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 또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봐야 할까? 그 사이 누군가는 () 죽고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내지만 말이다. 상처는 그렇게 전염되고 다시 아무는 듯 보이지만 결국 치유되지 않고 고여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아들에게서 얻었던, 유품처럼 남겨진 사진을 벽면 하나를 채우도록 크게 걸어둔 스티븐은 그 사진을 응시한다. 연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들, 그런 아들을 질투인지 뭔지 모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스티븐 자신 그리고 그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정면만 주시하는 안느. 그 사진 한 장 속에 이 상처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떻게 흐르는지를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정면을 주시하는 안느의 얼굴로 클로즈업되어가는 카메라는 마치 그걸 보는 관객의 삶 속에서도 데미지, 상처의 전염과 순환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주술을 거는 것처럼 서늘한 기운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