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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용의자X] 그건 사랑이었네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나 지금은 평범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살아가는 석고(류승범). 어느 날 그는 이웃에 사는 화선(이요원)의 집에서 들려오는 거칠게 다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욕설이 이어지고 잠시 뒤 이어진 정적. 8시에서 8 5분 사이에 일어난 이 우발적인 살인사건을 두고 석고는 알리바이를 설계하며 화선을 돕기 시작한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 형사 민범(조진웅)은 살해된 남자의 전처인 화선이 범인일거라는 심증을 갖고 집요하게 그녀 주위를 수사하기 시작한다.  

 

<오로라 공주>의 감독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만났을 때

방은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오로라 공주>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안타까운 모정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기억한다.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사회나 타인의 영향에 의해 어떻게 극한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로라 공주> <용의자X>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여인의 복수,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긴 트라우마가 어른이 된 후에도 미치는 영향 등을 작품 안에 심도 있게 담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도 닮아있다. 이런 면이 감독으로 하여금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게 하지 않았나 싶다. 방은진 감독은 여기에 멜로드라마의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원작과는 다른 자신의 색을 입히려고 한 것 같다.

 

 

 

뚜렷한 멜로드라마의 인증이자 변형

화선의 주변을 수사하던 형사 민범은 우연히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석고를 만나게 된다. 라일락 꽃잎을 입에 넣어주며 '사랑은 그렇게 쓰다'라고 장난치던 장면이 고등학교 동창인 둘의 기억으로 영화 속에 등장한다. 그런 대화를 나눴던 민범과 석고는 결국 이 영화의 방향이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닌 멜로드라마로 향하고 있음을 더욱 확실히 한다. 형사는 수사의 치밀함을 가하는 듯 하나 이는 석고의 화선에 대한 감정을 눈치 챈 후 결과적으로 둔해진다. 끝내 그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후반부 석고의 편지를 전달하며 석고의 감정이 화선에게 어떻게 표현됐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화선의 집 전화 기록 확인 등은 수사 초기에 이뤄졌어야 했을 텐데 그것이 영화 후반부에 배치된 것만 봐도 애초에 이 영화의 방점이 사건의 추리와 수사보다는 멜로드라마 같은 감정에 찍혀져 있었던 것임을 눈치채게 한다.

원작 소설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 속에 등장하여 논리적으로 석고의 알리바이와 대립하는 물리학자의 캐릭터를 제거하고, 그 역할을 '심증에 충실한 수사'를 벌이는 형사 민범에게 입혀낸 것도 논리적인 추리보다는 감정적인 멜로드라마로서 이 영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선택으로 읽힌다.

필터를 많이 사용한 듯한 영상과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연주가 빛났던 음악의 사용 등도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사랑을 하게 되는 두 사람이 있고 그들에게 위기를 제공하는 사회적 또는 인간관계적 요인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비극을 극복하거나 겪어내면서 인물들도 울고 관객들도 함께 빠져들어 울게 되는 것이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징이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용의자X>는 그 특징을 살짝 변형한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너는 내 운명>의 경우, 순박한 농촌 총각 석중(황정민)이 다방에서 일하는 여인 은하(전도연)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모든 어둠이 걷히고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그 둘 사이에 여인의 과거의 남자가 등장해서 훼방을 놓고 에이즈라는 병이 등장한다. 그 고통을 겪으며 두 인물이 쏟아내는 눈물과 주고받는 감정에 관객 또한 함께 눈물을 흘린다.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플롯이다.

<용의자X>의 경우, 그 위기 요인이 일찌감치 등장한다. 화선의 전남편이 등장해 순탄하게 살 것 같은 화선의 인생을 흔들어놓게 되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석고가 도움의 손길을 뻗게 되면서 둘의 감정이 오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어떤 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되지만 그 위기는 영화의 처음부터 이어져있는 위기인 것이고 중요한 건 멜로드라마임에도 둘의 감정이 서로 절절하게 완성되는 순간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간신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의 특징적 요소를 재배치한 플롯에서 보듯 <용의자X>는 우직하게 멜로드라마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장르를 조금 변형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석고가 증명해내고 싶어했던 수학의 공식과 닮아있는 사랑의 방식이라서 인상적이다. 석고는 증명해내고 싶다던 그 공식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그 공식을 풀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위에 올라가서' 물어보면 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석고는 공식을 풀어내는 결과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과정 자체에 가치를 뒀는지도 모르겠다. 화선에 대한 석고의 감정 또한 그렇게 읽힌다. 자신이 도움을 줬고 화선이 분명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순간에도 소심한 석고는 화선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관계의 진화를 맞지 않고 다만 자신이 가졌던 감정이 손상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석고가 바라보는 사랑의 대상이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수학의 공식과 동일하게 보이고 이 점은 영화의 맥락과 캐릭터에 동질성을 부여하는 매력이 된다.

'저를 믿고 따라주세요'. 마치 사랑의 조건이기라도 하듯 석고는 화선에게 자신이 제공하는 알리바이를 믿고 따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렇게 강조하던 '믿음'이 먼저 흔들리는 건 놀랍게도 화선이 아닌 석고다. 화선이 한 발짝 다가오는 듯 하나 석고는 뜻하지 않은 일로 화선을 오해한다.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먼저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석고의 성격은 <용의자X>를 슬픈 멜로드라마의 끝을 향해 가도록 만든다.

 

 

 

차분하게 누르며 표현하는 류승범의 연기 변신

배우 출신 감독이었기에 연기에 대한 디렉팅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란 예상을 하게 된다.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는 고르게 괜찮았다. 무겁게 슬픔을 전하는 영화의 엔딩과 함께 가장 먼저 스크린에 떠오르는 이름은 류승범이다.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이라는 배우의 이름이 나온 후 감독 방은진의 이름이 나온다. 배우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먼저 뜨는 경우가 드문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용의자X>의 경우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엔딩 크레딧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은 배우 출신 감독이 연기자에게 보내는 박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석고(류승범)의 취미는 프리다이빙이다. 어떤 호흡 보조기구 없이 물 속으로 들어가서 다이빙을 즐기는 이 취미는 자신의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석고에게 잘 어울린다. 어떤 순간에도 폭발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꾸부정한 걸음거리 또한 석고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을 텐데 이전 작품에서 이렇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배우 류승범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만하다. 아쉬운 점은 영화의 구성과 연결될 때 나타난다. 석고가 화선에 대한 감정을 쌓는 과정이나 수사가 진척되는 과정 또한 무척 차분한 속도로 전개된다. 속도의 완급이 없이 일정하게 진행된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간간이 터져 나오는 석고의 대사 톤 또한 꾸준히 일정하게 가라앉아 있다 보니 캐릭터가 조금 심심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대사의 톤으로 석고의 시종 차분하고 불감한 듯한 캐릭터를 표현하더라도 표정이나 눈빛의 흔들림 같은 포인트가 있었다면 조금 더 생동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원작 소설의 제목이 <용의자 X의 헌신>인데 이것을 영화로 옮기면서 <용의자X>로 표현한 이유는 뭘까 생각해본다. 석고의 화선을 위한 모든 행동과 결정은 헌신적인 것이 사실이다. 관객에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저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의 헌신은 대단하다. 그러나 헌신이 사랑을 전제로 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헌신으로 대체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던 것일까. 제목에서 헌신을 빼고 그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또는 그 사랑의 대상인 '용의자X'를 부각시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만든이의 의도가 그러했으리라고 가정하며 온전히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이 영화를 본다면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영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