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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BIFF2012] 부산에서 만난 영화 3-월드시네마

<3>(3) / 파블로 스톨 / 월드시네마

 

 

 

제 멋대로 사는 이기적인 가족 이야기 <3>. 별거 상태인 부부가 있다. 원상복구를 꿈꾸는 남편은 애쓰는 듯 보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다. 남편이 어떻게 하든 아랑곳않는 아내는 제 삶 살기에 바쁘다. 딸은 아빠의 뜻에 따라 가족의 회복을 바라는 듯 보이지만 이내 비뚫어져나가며 제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울타리에 살지언정 각자 다른 꿈을 꾸며 제 삶을 살아내기 바쁜 모습은 굳이 영화가 아니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우리내의 삶이니까. 그렇게 제 멋대로 살아가다가도 한 데 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모습 또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게 가족의 최선일까. 

굉장히 살갑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이면서도 구석구석 경쾌함을 잃지 않는 묘한 연출은 세련된 맛 없이 80년대 영화처럼 만들어진 이 영화(화면의 질감도 옛날 같다)에 맛을 내는 묘한 구석이기도 하다. (7/10)

 

 

<파라다이스 : 러브>(Paradise : Love) / 울리히 자이델 / 월드 시네마

 

 

 

욕망과 계급, 자본과 계산이 주고받는 관계가 실오라기 따위로라도 가리려는 위장 없이 완전히 까발려지는 도발적인 영화이자 케냐의 젊은 흑인 남성들의 성기를 클로즈업해 카메라에 담아내는 등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년 여성을 위한 포르노그라피처럼 보이는 논쟁적인 영화.

케냐로 여행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중년 여성은 물건을 팔겠다고 접근하는 케냐 청년들과 성매매를 한다. 중년의 여성은 사랑으로 포장한 섹스로 욕정을 채우고자 하고, 케냐의 청년들은 사랑으로 포장한 섹스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이 주고받음의 (다소 과하게 되풀이되는) 반복은 결국 공허한 결말로 가기 위한 장치인 듯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여자는 움켜쥐던 돈을 풀고 욕정을 채우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욕이 없는 순수한 청년을 만나며 그조차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영화제목대로 파라다이스엔 러브가 있을까? 애초에 그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들이 원한 것도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니었을까?

감독은 희망과 거짓을 이야기하는 파라다이스 3부작을 완성해낼 것이라고 한다. 이후 작품에서는 어떤 식으로 거침없는 까발림을 선보일지 기대해본다.(7/10)

 

 

<잠자는 미녀>(Dormant Beauty) / 마르코 벨로키오 / 월드 시네마 

 

 

17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죽음을 앞둔 엘루아나의 안락사 문제를 두고 실제로 벌어졌던 이탈리아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한다. 안락사에 대한 법안투표를 앞두고 고뇌하는 정치인과 안락사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그의 딸, 식물인간 상태의 딸을 돌보느라 배우의 삶을 포기한 여배우, 거렁뱅이처럼 살면서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는 여인과 그녀를 돌보는 의사 등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면서 안락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는 영화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삶이 감독이 말하려는 안락사 문제를 어떤 식으로 대면하는 역할을 하는지 애매하다. 왜 그들이 이 영화의 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고 왜 그들이어야 하는지 애매하다. (6/10)

 

 

<백설공주>(Blancanieves) / 파블로 베르헤르 / 월드 시네마

 

 

 

투우사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플라멩고 댄서인 그 여인에게서 곧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투우사는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운의 사고를 겪는다. 시간이 지나 딸과 상봉하게 되지만 그 사이에 낀 악독한 계모는 그들을 그냥 행복하게 살게 하지는 않는다.

<백설공주>와 <소공녀>의 이야기가 섞이고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플라멩고와 투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흑백의 무성영화는 <아티스트>로 전세계의 불어닥친 흑백 무성영화 신드롬을 잇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운 음악과 동화같은 이야기,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고전적인 설정 모두가 '클래식하고 아름답다'.

이미 <아티스트>가 있었기에 신선함은 반감됐지만 이 이야기에 담긴 백만가지 아이디어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강렬한 빨간색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흑백 무성영화를 만들어낸 비결은 무엇일까? 한편으로는 무성영화만이 존재하던 그 시절엔 어떤 식으로 각 영화에 개성을 부여했을지 궁금해지고 상상하게 된다. (9/10)

 

 

<항생제>(Antiviral) / 브랜든 크로넨버그 / 월드 시네마

 

 

 

 

만약 김태희나 이병헌의 바이러스를 몸에 지닐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그걸 원하고 구매할까? <항생제>는 흠모하는 연예인의 썩은 바이러스라도 자신의 몸 안에 주입하고 싶어하는 뒤틀린 상황과 인물들이 티없는 백색의 화면 속에서 살을 베고 피를 뿌려대는 그로테스크한 영화다. 그로테스크의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장편 데뷔작으로 하얗고 차갑고 기계적인 스타일 속에서 번뜩이는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함을 영화 내내 뿌려내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표 영화다. (6/10)

 

 

<애프터 루시아>(After Lucia) / 미셸 프랑코 / 월드 시네마

 

 

영화를 보면서 고통스러웠다. 소녀 알레한드라가 겪는 일들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와 단 둘이 낯선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하려는 소녀. 전학 온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주말 여행을 갔다가 찍은 섹스 동영상이 학교에 퍼지고 알레한드라는 억울하게도 일방적인 집단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 누구에게도 상황을 말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소녀를 보며 불편해하고 답답해했던 내 속을 풀어준 것은 그 소녀의 아버지다. 물론 완전 해결은 아니다. 세상에 완전 해결이 있기나 하겠는가. 어쨌든 소녀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마지막은 통쾌했다. 대책 없는 복수였다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행동은 대책을 세울 때 세우더라도 꼭 했어야만 했을 최소한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복수는 너무나도 '깔끔'하다. 애초 근거 제공자의 싹을 자르는 것 같은 깔끔함, 받은 것에 더함도 덜함도 없는 것 같은 적합함이 느껴지는 행위였기에 강렬했고 숭고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와 오종의 <See the Sea 바다를 보라> 이후 가장 강렬하게 바다의 파도 소리를 엔딩 크레딧에 남긴 작품이리라.

아버지의 캐릭터 구축은 너무나도 논리적이다. 영화의 오프닝, 이제 막 수리한 차를 거칠게 운전하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도로 한복판에 차를 버리고 떠난다. 무려 폭스바겐인데. 그런 아버지의 행동들이 왜 나왔는지 어떻게 아버지의 행동과 그 캐릭터를 설명하는지 영화의 마지막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영화 물건이다!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