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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헐리웃판 광식이를 만나다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Greeting Card 회사에서 일하는 톰(조셉 고든-레빗)은 사장의 비서로 새로 들어온 섬머(쥬이 드샤넬)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다. 사춘기 전에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을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본 영향 덕분인지 톰은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로맨틱한 이상을 품고 산다. 반면 섬머는 어릴 적 이혼한 부모의 영향 때문인지 사랑이라는 것에 매우 냉소적이다. 섬머를 운명이라고 여기는 톰과 그저 캐쥬얼한 친구 관계로 생각하는 섬머의 500일에 걸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영화 (500)Days of Summer

 

소녀를 만나게 된 소년의 500

어쩌면 둘은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다른 두 사람은 그렇기에 행복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힘들어지기도 한다. 영화는 남성인 톰이 섬머를 알게 된 후의 500일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1일부터 500일까지의 순차가 아닌 온전히 섬머에 의한 톰의 1일과 500일 사이를 넘나들며 보여준다. 이로서 우리는 이 사랑 이야기가, 아니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몇 가지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게 한다. 첫째, 1단계부터 시작해서 500단계에 다다른다 하여 어떤 완성을 결실로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 둘째, 500단계 전에 모든 걸 다 이룬 것 같아도 그 다음단계에서 다시 1단계로 곤두박칠 수도 있다는 것, 셋째, 결국 다른 사람 마음이 나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500일 동안의 톰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가 세상을 다 잃은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절대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어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뿐임을 강조한다.

 

헐리웃판 광식이, 그러나 로맨틱코미디의 관습을 깨는

영화는 장면 곳곳에서 그간 보아왔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모습들을 떠올리게 한다. 긴긴 시간동안 두 남녀의 데이트에 전 장면을 할애하는 것은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하고 조숙한 꼬마 카운슬러의 등장은 <어바웃 어 보이>를 연상시킨다. IKEA에서 노는 시퀀스는 로맨틱 코미디의 각인을 쾅쾅 찍어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우리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식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톰의 캐릭터의 근거에 영화 <졸업>이 등장하고 영화의 후반부에 살짝 긴장감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광식이 동생 광태>의 후반부에 광식이가 짝사랑했던 후배의 결혼식에 처들어가는 설정이 <졸업>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그저 동양과 서양의 헐리웃키드들의 어쩌다 딱 맞은 기호라고 보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건 약과다. 관계에 대한 운명론과 그 운명을 만나는 설정은 두 영화가 너무나도 닮아있다. 차이점을 찾는다면 광식이가 좀 더 소심하고 한국의 캐릭터인지라 좋아하는 상대와의 관계가 좀 더 깊지 못했다는 정도랄까. <광식이 동생 광태>와의 유사함을 차치하고 본다면 (500)DAYS OF SUMMER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과로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에서 완벽하게 전복을 시도한다는 면에서 참신하고 그렇기에 선댄스에서의 열광적 호응에 수긍이 간다. 어쨌거나 500일 뒤에 톰과 섬머가 해피엔딩을 맞아 결혼을 하거나 멋들어진 키스로 마감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최소한 영화는 그렇게 흔해빠진 공식대로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광식이 동생 광태>를 본 덕(?)에 이 영화는 별 하나의 평점을 잃었다, 나로부터.  

  

 

여자들이란...

톰은 말한다. 복사실에서 키스를 먼저 한 것도, IKEA에서 손을 잡은 것도, 샤워섹스도 다 네가 먼저였으면서 왜 만날 이렇게 뒷걸음질을 쳐서 나를 힘들게 하냐고 말이다. 이건 섬머의 잘못일까? 아니 내가 볼 땐 세상 모든 여자가 다 그렇다. 세상 모든 여자는 남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게 죄일까? 그것도 아니다. 굳이 죄인을 규정하자면 그런 여자보다 덜 독립적이고 더 순진한 남자쪽이 죄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죄인이건 뭐건 간에 어쨌건 이런 관계를 통해서 남자는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 관계에 대해서 순진하게 상처를 받고 자해다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파괴한 뒤에라도 그 깨달음은 문신처럼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곧 희망이다. 500일 전에 톰에게 섬머는 운명이고 유일한 것이었겠지만 그건 늘 처음같지는 않다. 그리고 느낌이라는 것이 늘 제대로 운명과 연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희망은 있고 톰이 기다리는 운명은 또 온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톰을 기다린다는 것, 이 영화가 주는 마지막 재치다.      

 

 

 

<광식이 동생 광태>를 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아마 이보다 더 인상적인 영화가 됐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다룰 줄 아는 감독과 배우들은 2009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으로부터 가장 각광을 받은 작품으로 (500)DAYS OF SUMMER를 이끌었다. <해프닝>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고 <예스맨>에서는 리즈 위더스푼을 닮은 신예 배우 정도로만 내게 인식됐던 쥬이 드샤넬은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인 미소와 눈빛과 머리칼을 갖고 있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 확실히 보여준다. 특히 가라오케 회식에서 <SUGAR TOWN>을 부르는 모습에서는 내가 톰이 되고 톰이 내가 되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였다. 알고보니 그녀는 이미 미국 인디 영화계에서는 신데렐라급이라고 한다. 마르고 연약해보이는 죠셉 고든-레빗 역시 섬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톰을 완벽하게 그려내어 남자들로 하여금 공감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나 <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식이 못지 않게 여려보이는 캐릭터이지만 다음 작품은 헐리웃 블록버스터 <G.I JOE>에서의 악역 코브라 커맨더라고 하니 다소 의아한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