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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통증]곽경택과 강풀의 콜라보레이션, 그러나 수혜자는 권상우와 정려원처럼 보이는 영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맞고 맞아서 돈을 번다. 자해를 하든 시위현장에서 방패 노릇을 하든 그는 맞는 것으로 밥을 먹고 산다. 맞고 맞아도 통증을 못 느끼는 남자, 그래서 그 업은 이 남자에게 천직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어릴 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남자는 그 때 받은 충격과 상처가 너무 커서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충격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잃은 채 살아갈 뿐이다. 아픔을 밖으로 분출시키지 않는 남자, 아픔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남자.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팔며 산다. 여자는 혈우병이 있다. 혈액을 조절하는 약을 매일 투여해야 하고 작은 상처도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체외로 흐를 수도 있다. 그녀는 가족이 없다. 언제나 혼자고 붙어 다니는 사람이라곤 돈 달라고 쫓아다니는 사람들뿐이다. 아픔을 밖으로 분출시킬 수 없는 여자, 살짝 움켜쥐기만 해도 아픔이 다 빠져나가는 스펀지처럼 연약한 여자.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만난다. 채무자와 그 돈을 받으려는 해결사로. 그리고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는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끌리고 만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슬프다.

 


곽경택 감독과 강풀 작가가 만나 탄생한 영화 <통증>은 이렇게 많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이고 그 둘을 기다리는 가슴저린 끝을 보여주는 영화다. 남자 이야기를 잘 다룬 곽경택의 장점과 착한 사람들의 따뜻함을 기대할 수 있는 강풀 작가의 장점이 어떤 조화를 이룰 지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둘의 조화를 보는 맛 이상으로 두 주연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두 작가의 만남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내는 데 상호보완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그 수혜자는 연기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통증을 못 느끼는 남자 남순(권상우)과 작은 상처도 조심해야 하는 여자 동현(정려원)은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상태를 더욱 안타까워한다. 아픔을 모르는 남자는 너무 아파하는 여자가 안쓰럽고, 유리처럼 부서질까 조심해야 하는 여자는 그 통증의 무게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알기에 남자가 안쓰럽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과거의 상처와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어 서로에 대한 안타까움이 극단적으로 커지고 그 마음이 사랑이 된다. 서로 다른 남녀의 상황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그 차이로 인해 둘이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연민이라는 감정은 두 인물을 엮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관객에게도 똑같이 발생해 두 캐릭터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령 두 사람이 친밀해지고 같은 집에 살게 되는 설정이 너무 갑작스러워 보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깊은 상처와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핸디캡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듯 하다. <통증>은 그렇게 선명하면서도 연민을 갖게 하는 캐릭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데 특기를 발휘한다. 비슷한 예로는 <너는 내 운명>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잘 되어 득을 보는 것은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일테고, 잘 안되어 실을 본다 해도 그 역시 배우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권상우와 정려원은 확실히 득을 본 것 같다. 솔직히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배우는 그 기대를 훌쩍 넘어, 기대를 하지 않은 게 미안할 정도로 조화롭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남순을 연기한 권상우는 <통증>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권상우를 다시 생각하게 할 정도다. 곽경택 감독은 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잘 그려냈다. <친구><똥개><사랑> 모두 남성 캐릭터가 부각되고 그 캐릭터를 연기한 남자 배우들이 배우로서의 한계를 넘거나 새롭게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었다. 여기에 무뚝뚝하지만 선하고 순한 전형적인 강풀식 남성 캐릭터가 덧입혀지면서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가 완성됐다. 내내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데 그 속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연기를 권상우가 한 적이 있던가. 그가 그의 장기인 장난기 섞인 보조개 들어가는 웃음을 스크린에서 보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통증>에서 권상우는 그의 그런 특징을 철저하게 감춘 채 곽경택과 강풀이 만들어낸 남자를 연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의외로 그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캐릭터가 그에게 잘 맞는 옷처럼 보인다.


정려원의 연기에서 가장 큰 장점은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인 듯 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다. 부자연스러움은 그녀가 갖고 있는 이미지에서 나온다. 배우로서 정려원은 언제나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다고 느꼈다. 몸이 아픈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눈이나 얼굴에서 풍겨져 나오는 이미지에는 힘이 있다. 그건 극도로 마른 체형으로 보이는 몸과 얼굴에 눈을 크게 힘주어 뜨고 있거나 코가 부각되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대사 하나하나를 해도 긴장감이 배어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느낌이 정려원의 이미지였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정려원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녀는 여전히 깜빡이지도 않는 것 같은 큰 눈을 인형처럼 뜨고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대사를 하는 발음 하나하나도 일부러 정확하게 하려는 사람처럼 힘을 주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늘 나라하늘라라처럼 들리게 발음 하는 것이 아닌 하늘나라로 또박또박 발음하거나 서울바닥서울빠닥이 아닌 서울과 바닥으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 힘이 들어가있음이 느껴진다. 모 평론가도 이 부분을 트위터에 지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부분이 <통증> 속 동현의 캐릭터 속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혼자서 밤새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혈우병 약을 주사기에 넣어 스스로 투약하는 그 캐릭터는 하늘나라하늘라라가 아닌 하늘’ ‘나라라고 또박또박 발음해도 어울리는 것 같이 보인다는 거다. 이게 계획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이 영화 안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게 어색했다면 감독이 다시 촬영을 했겠지 싶기도 하다. 그게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배어나기 때문에 관객에게까지 보여진 것이리라 여겨진다.

이렇듯 두 배우가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하고 묘하게 영화와 들어맞는 궁합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간혹 느슨한 내러티브, 비현실적인 설정, 만화적으로 보일 수 있는 비극마저도 관객을 설득하는 힘을 실어준다. 그래서 결국 그 결말을 보면서 그 캐릭터들을 생각하며 관객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남자 캐릭터를 잘 그리는 곽경택과 가슴 따뜻한 캐릭터 배치와 폭력과 비극 속에서도 페이소스를 끌어내는 강풀 작가의 소위 콜라보레이션은 사실 궁합이 100%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콜라보레이션을 함께 채워낸 배우들의 기대 이상의 역할은 영화를 보통 이상의 우성인자로 만들어냈다. 애초에 주목은 곽경택 감독과 강풀 작가의 만남이 받았겠지만, 이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최후의 승자, 결정적인 수혜자는 두 배우 권상우와 정려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