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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북촌방향] 호러라는 장르의 홍상수식 도입 또는 표현

 

*스포일러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영향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

 

서울에 다니러 온 성준(유준상)은 북촌을 걷는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인 듯 한데 마치 초등학생이 일기장에 다짐하듯 읊조린다. 친한 영호형(김상중)이나 만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얌전하게 있다가 내려가자고 말이다. 오프닝에 흐르는 내레이션부터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대목이다. 관객들은 알 것이다. 성준이 결코 얌전하게 있다가 가지는 못할 것임을. 모르면 몰라도 몇 명의 여자를 만날 테고 술을 진창 마실 테고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을 테고 술 넘어가듯 술술 괴변을 늘어놓을 것임을 말이다. 적어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성준이라면 그럴 것임을 말이다.

 

이제는 주욱 헤아리기도 좀 귀찮을 만큼의 작품 수에 다다른 홍상수 감독의 신작 <북촌방향>은 이렇듯 관객을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며 시작한다. ‘, 난 또 홍상수의 영화 속으로 들어왔구나, , 이번에도 흑백이네정도의 아주 익숙한 그림을 대하는 자세로 영화를 보게 된다. 형광색 대비를 이루는 글씨로 시작하는 오프닝 크레딧이 거슬리는 것도 잠시, 눈 앞에 펼쳐질 세계가 아주 안락하고 익숙한 공간일 것임을 한 치의 의심도 않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홍상수의 다른 어떤 영화와는 다르다. 패턴은 있다. 역시나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나누고 말도 안되게 눈빛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이 익숙한 패턴 속에서 이전의 홍상수 영화와는 다른 뭔가를 보여주는 게 <북촌방향>이다. <북촌방향>이 이전 영화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성준이 만나는 여자 경진과 예전이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영화 속 배치 순서로 보자면),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시게 된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말도 안 되는 주사를 늘어놓으며 성준이 달려간 곳은 예전에 알던 여인 경진(김보경)의 집이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사이지만 성준의 용서를 빙자한 응석과 사랑을 빙자한 주사에 경진은 성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잠시 후 성준은 마치 들어왔을 때처럼 어색하게 경진의 집을 떠난다. 관객은 추측할 수 있다. 성준이 예전에 경진을 떠났을 때도 저랬을 것이라고. 그리고 의심하게 된다. 영화가 시간을 거꾸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관객은 성준이 경진의 집을 찾아와서 응석을 부리고 그 후 담배 4개비 주고 떠나는 순서로 영화를 보지만 실제로 성준의 삶은 담배 4개비 주고 떠났던 경진을 몇 년 후 다시 찾아온 순서로 진행됐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잠깐의 의심은 밝아온 낮 볕에 접어두게 된다. 다시 북촌으로 나온 성준은 이제 본격적으로 영호형을 만나려고 한다. 그 사이 예전에 알던 여배우도 길에서 만난다. 영호형을 만나고 영호형의 후배인 여교수(송선미)를 만나 소설이라는 술집으로 향한다.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는 소설’. 뒤늦게 나타난 주인 예전(김보경)은 주인 없는 공간을 지켜준 손님들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후 안주를 챙기러 들어간다. 그녀를 본 성준은 말한다. ‘똑같은데, 아무래도 똑같단 말이야.’ 성준은 무엇을 두고 똑같다고 한 것일까? 예전의 얼굴이? 아니면 지금 일어난 상황이? 단순히 경진과 닮은 예전의 얼굴을 보고 한 말 같지는 않다. 마치 기시감을 경험한 듯한 그의 대사는 어쩌면 이 상황이 그에게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성준은 소설에 머무는 동안 경진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성준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못한다. 경진과 예전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말이다. 여기까지 보다 보면 슬슬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성준의 정신이 이상한가, 경진과 예전은 쌍둥이일까, 아니면 예전이 예전의 경진은 아닐까, 관객이 보는 성준은 지금의 성준인가? 과거의 성준은 아닐까? 그리고 저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들이 진짜 성준과 예전과 영호와 여교수인가? 이처럼 성준이 만나는 경진이라는 이름의 또 예전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리고 그 예전을 만나게 되는 공간 소설’, 그리고 그들을 만나도록 소설로 이끄는 영호와 여교수는 뭔가 범상치 않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두 번째는 되풀이되는 상황이다. 이전 홍상수 영화를 봤던 사람들이라면 영화 속 되풀이되는 상황이 이상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인물들이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북촌방향>의 되풀이는 뭔가 다르다. 주체에 따른 기억의 차이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같은 일이 시간을 따라 가면서 되풀이되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 그게 반복되는 걸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반복되는 블랙홀 속에 있는 걸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뫼비우스의 띠 위를 무기력하게 걷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게 술 때문이든 삶이 그렇듯 서로 닮은 꼴이어서 그렇든 말이다. 그래서 이런 되풀이되는 상황은 묘하게 으스스하다. 우연하게 4명의 영화인들을 만났다는 여교수의 말에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하는 와중에 성준은 그 우연이 왜 발생하는지, 왜 신기한 게 아닌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실제로 이 장면은 NG가 엄청나게 나서 배우들이 모두 도망치고 싶었을 지경이라고 한다). 이상한 건 그런 우연에 대해 장황하지만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했던 성준도 나중에(이게 진짜 나중인지 그 전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런 경험을 직접 하게 되고, 그 때의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멍하다는 것이다. 마치 현상을 설명하라면 경험이든 뭐든 다 끄집어내 설명하면서도 막상 그 현상 안에 자신이 처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 같은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벗어날 수도 없는 되풀이되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맴도는 것이다. 성준이 여교수처럼 4명의 사람들을 연달아 만나게 되는 장면 바로 전의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으로부터 이어진다. 영화의 첫 장면과 같은 길을 따라 내려오던 성준은 영화의 첫 장면과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어서 간다. 하지만 그 길 또한 결국 북촌 방향이라는 것은 그가 잠시 서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계속 서울에, 그것도 북촌에 머물며 맴돌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세 번째로 소설의 구석방에서 예전과 정사를 벌이는 성준에게 예전이 말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예전은 말한다. ‘오빠는 제가 누군지 모를 거에요’. 경진과 닮은 예전의 모습,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 못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예전, 느닷없이 성준을 오빠라고 부르는 예전을 보면서 저 여자의 정체는 뭘까 하던 관객은 오빠는 제가 누군지 절대로 모를 거에요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르겠다. 순간 소설의 주인이 지금 성준과 함께 누워있는 저 여자인지, 지금 성준과 누워있는 저 여인이 혹시 경진은 아닌지, 아니면 제3의 여인인지 성준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 다만 성준의 눈에도, 관객의 눈에도 그 여자는 예전으로 보일 뿐, 그 누가 알겠는가. (시네마톡에서 배우 유준상이 말한 촬영은 했지만 편집된, 그러나 어떤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다던, 일종의 비밀 같은 그 장면을 생각해보면 이 장면에서 느낀 으스스함이 감독의 의도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런 장면들이 모이고 모여 <북촌방향>은 이전 홍상수 영화와는 달리 호러 영화를 본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호러 장르의 영화가 보여주는 일종의 설정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호러의 으스스함을 느끼게 하는 것, 홍상수의 익숙한 패턴을 보여주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이 <북촌 방향>이 이전의 홍상수 영화와 다른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처음 시작 부분에 관객을 무방비 상태로 느슨하게 만들면서 시작했다가 옷가지를 덧입으며 긴장하게 만드는 엔딩을 선사한다.

이 묘한 느낌,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의외의 묘한 느낌이 몇 번째인지 세기도 귀찮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서 이 영화를 추천하게 만든다. 예의 홍상수 영화를 통해 기대치가 모두 충족되었으니 더 새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싶은 관객들이라도 <북촌방향>을 보면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이후 그의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 지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기묘한 술을 영화에 탄 듯 하다.

 

 

<상암 CGV 무비꼴라쥬 시네마톡에 대한 짧은 감상> - 2011년 9월 5일

 
아마 이렇게 분위기 좋고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던 시네마톡이 과거에 있었나 싶었던 자리였다. 그야말로 시네마톡의 레전드라고 부르고 싶은 이 날의 주인공은 배우 유준상과 김보경 그리고 무비위크 송지환 편집장이었다.

유준상 배우는 굉장히 편안한 입담의 소유자였는데, 영화 촬영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아주 솔직하고 위트 있게 관객에게 전달했다. 예의 쪽대본(?)’즉흥촬영에 대한 고충은 여러 매체를 통해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이 즐거웠다고 이야기했던 그의 입을 통하니 엄살처럼 느껴졌다.



재미난 사실 몇 가지는 홍상수식 술집 장면의 진실과 홍상수식 장면 그리기의 단순함에 대한 것이었다. 홍상수 감독은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실제로 배우들이 술을 마시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은 자의든 타의든 술을 멀리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배우 김상중은 무려해병대 출신임에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다고 하고, 김보경은 몸이 안 좋아서 약을 먹는 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유준상 배우도 맥주 한 잔이면 얼굴이 벌개질 만큼 술이 약하다고 한다. 송선미 배우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니 관객을 박장대소케 한 그녀의 취한 연기가 다시금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술을 강제로 마신, 실제로 취할 정도로 마신 배우는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 (술을 즐긴다는 김의성 배우만 마셨다고 함)


영화 속에서 성준은 소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그 때 영호가 말한다. ‘쟨 저거 연습할 때 오른 손으로 한달, 왼손으로 한달, 그리고 양손으로 한 달 이렇게 익혔어라고. 그런데 실제로 유준상 배우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 음악을 연습하면서 그렇게 연습을 했다고 하고, 과거의 어느 순간 그걸 홍상수 감독에게 얘기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은 들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영화에 대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홍상수식 장면 크리에이티브의 단순성의 한 예가 아닐까 한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김보경 배우는 과거 여러 차례 홍상수 감독 영화의 오디션을 통해 출연할 뻔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마다 일이 틀어져서 기회를 잃었는데,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왜 느닷없이 이 영화를 하면서 홍상수 감독이 자신을 찾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사실 경진 역할은 애초 문소리 배우가 하기로 했었으나 출산 문제로 인해 하차하고 김보경 배우가 그 역을 연기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캐스팅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 그녀의 의문이었고, 이에 장황한 성준식 우연론으로 응수하는 게 유준상 식 재치였다.

 

이 자리에서 유준상 배우는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이 이미 촬영이 완료됐음을 알렸다. 제목은 <다른 나라에서>. 배우는 유준상과 (무려) 이자벨 위뻬르다. 유준상의 말을 빌리자면 배꼽 빠지게 웃을 수 있는 영화라고 하니 또 어떤 홍상수식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하게 된다.

 

                                     <시네마톡 이후 사인을 해주고 있는 유준상 배우>

끊임없는 질문과 배우들의 허심탄회한 답변, 화기애애함이 넘쳤던 시네마톡. 올해 들어 진행된 시네마톡 중 <파수꾼> 이후 가장 뜨거웠던, 어쩌면 그보다 더한 시네마톡이었던 것 같다.  아마 두고두고 시네마톡의 레전드로 인구에 회자될 만한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