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처럼 보이는 공간, 한 소년이 삭발을 당하고 있다. 원치 않는 삭발을 당하는 것 같음에도 소년은 ‘꼿꼿하게’ 한 곳만을 응시한다. 카메라는 그 소년의 얼굴로 점점 다가가고 소년의 ‘꼿꼿한’ 몸에서 나오는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스크린을 응시하기가 불편해진다. 발 뒤꿈치에 3개의 점이 오래된 문신처럼 남아있는 소년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화면은 전환된다.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의 갑작스런 죽음 후, 유언장 공증인 앞에 앉은 쌍둥이 남매가 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잔느와 시몽은 공증인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씩 받는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작성된 그 편지 중 한 통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나머지 한 통은 그들의 형제에게 쓰여진 것이다. 이 편지가 쌍둥이 남매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고, 그들에게 형제가 존재한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두 통의 편지를 아버지와 형제를 찾아 전달하기 전에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는 것이 어머니의 유언이고, 그 편지를 다 전달한 후에 이 둘에게 또 한 통의 편지가 기다린다고 한다. 의문을 품은 채 갑작스레 발생한 어머니의 죽음과 어머니가 남긴 편지, 존재 조차 불분명한 다른 가족들을 찾아내야 하는 이 남매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이 남매의 여정에 어머니인 나왈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끼어들며 점점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중동 지역의 낯선 언어와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의 흔적, 형제의 흔적을 찾는 동안 발견하게 되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는 쌍둥이가 알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를뿐더러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다른 민족인 남자 와합과 사랑에 빠진 나왈의 운명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랑이 적발되어 와합은 살해당하고 자신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둘 사이에 생긴 아이를 출산하지만 그 아이는 출산 즉시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 후 고향을 떠나 삼촌이 있는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하는 나왈. 하지만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종교 내란은 그녀를 다시 가혹한 운명에 처하게 만든다. 전쟁 통에 고아원에 맡겨진 아들을 찾겠다고 나선 나왈은 그 여정에서 끔직한 내란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함을 경험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복수를 계획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된 그녀는 온갖 고문과 강간을 당하며 15년을 복역한다. 온갖 고문에도 꼿꼿한 그녀, 고통 속에서도 노래하는 72번 수감자, 노래하는 여인으로 말이다.
쌍둥이 잔느와 시몽이 차츰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되고 점점 그들이 전해야 할 편지의 대상에 다가가게 되는 순간 남매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왜 나왈이 갑작스럽게 죽게 됐는지 쌍둥이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주는 충격은 장담컨대 결코 만만하게 관객을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1 더하기 1이 1이 될 수 있을까?” 진실을 먼저 알아버린 시몽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잔느에게 묻는다. 1 더하기 1이 1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는 그 둘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전율케 한다. 하지만 이후 그것이 결국 나왈이 가혹한 운명을 견뎌내면서 꼿꼿이 싸워오며 지키려 했던 화합과 조화, 화해와 사랑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거기에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에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그 어머니에겐 쌍둥이 아이들이 있었고 그 쌍둥이 아이들에겐 아버지가 있었고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결국 하나였을 수 있고, 함께였을 수 있었다. 다른 이념과 그로 인한 전쟁이 그 하나를 무참히 갈라놓고 고통 속에 살게 했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 1더하기 1에 또 1을 더하고 또 1을 더해도 결과가 1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살아내기조차 힘든 세월을 버텨낸 어머니 나왈은 그의 자손들에게 유산처럼 남기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왈이 겪어야 했던 시간은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녀의 꼿꼿한 의지가 없었다면 그렇게 살아낼 수 없었을 그 삶의 흔적을 좇아 같은 길을 걷는 시몽과 잔느의 길은 모순이라고 느껴질 만큼 평화롭다. 나왈이 초조하게 걸어야 했고 총살의 위협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버스 안에서 그녀의 딸 잔느는 음악을 들으며 잠에 빠지거나 생각에 젖을 뿐이다. 똑같은 길 위를 가면서도 천국과 지옥의 상반된 상황이 시간을 전후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평화를 위해 꼿꼿이 싸워왔던 그들의 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평화 속에서 여전히 꼿꼿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 길을 함께 하는 음악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의 확연한 차이를 만들며 현재의 평화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한편 영화 속에서 수영장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된다. 첫 번째 거대한 진실을 알게 된 남매는 그 충격을 폭풍 수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물 속에서 하나로 부둥켜 안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마치 엄마의 뱃속 그 양수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것처럼, 그 모든 진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발버둥치는 장소가 된다. 한편, 나왈이 죽음을 맞기 전 자신의 가혹한 운명이 품었던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장소도 수영장이다. 그녀는 그 곳에서 송장처럼 멎어버린다. 숨은 있지만 말도 하지 못하고 눈도 꿈쩍이지 못하는 산 송장이 되어버릴 만큼 충격적인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곳이 수영장이다. 하지만 그 수영장에서 나왈이 알게 된 것과 결심하게 된 것은 결국 1+1=1이 되어야만 한다는 여전한 꼿꼿함이다. 숨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재처럼 바스러진 상황이었겠지만 그녀는 결국 죽기 전에 지켜야 하는 것, 그 사명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꼿꼿해진다. 그리고 유언으로 편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를 우리나라의 과거에 적용시켜서 각색을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봤다. 근,현대를 관통하며 가혹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많았는가. <그을린 사랑>의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2010년 부산 국제 영화제를 통해 국내 관객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았던 영화 <그을린 사랑>은 부산 뿐만 아니라 자국인 캐나다를 비롯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충격과 감동 속으로 관객을 빠지게 한 화제작이다. 영화를 다 본 사람들도 영화의 줄거리를 전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진실, 그 먹먹함이 오랫동안 남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를 본다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