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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애정만세>세상의 모든 애정, 만세!_CGV무비꼴라쥬 시네마톡과 함께

산정호수의

여자(서주희)는 달콤한 꿈을 꾼다. 산정호수로 야유회를 갔던 날, 같이 23각 게임을 했던 그 남자의 모습을 꿈에서 본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따뜻하게 보듬음을 당하는 것이 처음이기라도 한 냥, 여자는 행복에 젖는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그 여자의 꿈이다.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만 여자는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잠이 깬 방을 멍하니 둘러보다 책상 위에 놓여진 딸의 핑크빛 어그 부츠를 보며 그 꿈의 기분을 연장한다.

부지영 감독의 단편 <산정호수의 맛>은 여자의 산정호수에 대한 자기 기억, 그 추억에 핑크빛 맛을 부여한 그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는 그 추억의 맛을 따라 남자의 집 앞에도 가보고 괜히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산정호수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한다. 혼자 산정호수에 가서 얼어붙은 호수에 고정된 오리배를 타보기도 하고, 핸드폰 고리를 보면서 있지도 않은 추억을 만들어낸다.

이런 여자의 망상(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놀이’)은 꽤나 몰입도가 높다. 덕분에 관객은 어느 부분에선 그것이 실제인지 여자의 상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여자의 감성에 바짝 달라붙어 화면 가득 여자의 얼굴을 잡아내는 카메라 앵글은 관객을 그 여자에게 몰입하게 하기도 하고, 그건 단지 그녀의 상상일 뿐임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자기만의 추억을 쫓아 떠나는 여자의 하룻동안의 여행은 어쩌면 산산조각이 나지만 여자는 그 현상엔 아랑곳하지 않고 초코바를 우그적우그적 씹으면서 카메라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남자가 초코바를 씹었든 말았든 여자는 그 여자만의 핑크빛 산정호수의 맛을 간직하고 살 테다.

<산정호수의 맛>‘<피아니스트>의 이자벨 위뻬르가 <아멜리에>의 오드리 또투를 만났을 때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여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직 그녀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야말로 ‘1인칭 그 여자 시점을 보여주는 영화는 그녀를 다소 기괴하게 보이게도 하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의 사랑의 방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피아니스트>를 보고 <아멜리에>를 보면서 관객들이 그녀들의 사랑의 방식에 고개를 끄덕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애정만세다.

미성년

남자(허준석)는 잠에서 깬다. 그 꿈이 달콤했을지 쌉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잠에서 깬 남자가 그 꿈에 빠져 몽롱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잠에서 깬 이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류혜영)가 벗은 몸으로 자신의 옆자리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잠이 확 깨고 술이 확 깬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멍한 상태다. 여자를 깨우고 같이 짬뽕을 먹으면서도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여자의 말 폭격을 당한다. 최소한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조차도 남자는 얻지 못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여자는 남자를 다시 찾아온다. 심지어 그녀는 고등학생이다. ‘미성년’! 유난히 짬뽕을 쩝쩝거리면서 먹는 그녀는 남자를 쥐락펴락한다. 미성년자와 동침을 하고 그녀에게 끌려 다니는 남자는 영락없는 죄인 또는 노예의 모습이다. 그렇게 어이없는 둘의 관계가 이어지지만 한 쪽이 미성년인 관계에 상식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도 벌어진다. 그 갈등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겨울처럼 흐르고 다시 남자를 찾아온 여자에게 남자는 말한다. 짬뽕 곱빼기를 사주겠노라고.

<미성년>을 보고 있자면 인간이 맺어가는 관계라는 것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따지고 봐도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왜 그 둘이 그렇게 서로에게 끌리게 됐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관계가 왜 발생했는지 따질 수도 따질 이유도 분명치 않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 애정의 방식이 됐을 테니 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애정만세다.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 숏숏숏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진 단편 중 두 편을 모아 개봉한 <애정만세>는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두 개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늘 진부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신선한 사랑 이야기를 찾으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깜짝 놀랄 만큼 낯선 사랑이 펼쳐지면 기겁을 하고 설왕설래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사랑도 있어라고 말해주려는 것 같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랑이 다 똑같아 보이더라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다 다른 것이 또한 사랑이리라. 천명의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500가지 이상의 사랑의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최소한 말이다. 영화는 그 수많은 사랑의 방식 중 두 가지를 보여주면서도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낸다. 모든 사랑의 방식, 그 애정에 만세를 불러주자고 말이다. 그럼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해야 할 일은 뭘까? 사랑을 하고 각자의 사랑에도 만세를 불러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에도 만세를 불러주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 천지 애정 만세다.

 

<애정만세> 시네마톡

무비위크송지환 편집장의 진행으로 부지영 감독, 양익준 감독, 배우 허준석과 류혜영이 함께 한 이 날의 시네마토크는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보다 한 단계 더 유쾌한 자리였다.

송지환 편집장은 시네마톡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에 꼭 힘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는 걸 느끼게 해줬다. -도대체 왜 저렇게 짬뽕을 쩝쩝대면서 먹느냐, -영화 속에서 만든 음악의 제목이 뜻하는 건 뭐냐, -크레딧을 보니 최다니엘, 장기하, 류현경의 이름이 의상 담당에 보이던데 그들이 우리가 아는 그 최다니엘과 장기하와 류현경이냐 등의 질문은 지극히 관객의 시선을 배려한 질문들이었다. 심지어 영화 속 여자의 상상 장면을 실제 장면으로 혼돈했다는 고백이 되어버린 순간은 그 대화 속에 참여한 관객을 좀 더 편안하게 분위기에 녹게 만든 것 같다.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 또한 편안하게 자리에 녹아났다. -‘맛있게 먹는 연기를 한다고 했고, 차갑게 식은 짬뽕을 먹으면서 그렇게 연기했던 것이 아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래 음식을 먹을 때 그렇게 맛있게 먹는다더라’(류혜영),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해외 영화인들과 술을 먹다가 음담패설을 각자의 모국어로 해봤던 경험이 있는데, 그 때 일본 친구한테 들었던 말이 인상에 남아 영화에 써봤다’(양익준), -‘적은 제작비 내에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실제로 저 배우들과 가수에게 의상을 협찬 받아서 진행했다’(양익준).

대화 속에서 양익준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또 그 후에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추천 받아 읽었노라고 얘기했다. 별 기대 없이 본 책인데 너무 몰입해서 몇 페이지를 몇 시간 동안 읽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만큼 책에서 말하는 사랑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나이를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 다른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 모든 사랑에 만세를 부를 수 있으려면 어쩌면 사랑의 기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대화 속에서 찾아서 곱씹으며 이 날의 시네마톡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