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나의 절친 악당들] 임상수가 돌아왔다

 

 

임상수 감독이 돌아왔다. ‘나의 절친 악당들’이라는 제목에, 액션 영화인가 싶게 보이는 예고편에, 류승범 이라는 핫한 아이콘까지 가세했다. 임상수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20세기폭스가 ‘런닝맨’과 ‘슬로우 비디오’에 이어 투자, 배급하는 한국영화라고 하니 뭔가 이전의 임상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여름용 블록버스터급으로 나오려나보다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이건 그냥 임상수 영화였고 20세기폭스가 투자, 배급하면서 최소한 영화에 대해선 휘두른 권한이 없었나보다 싶기까지 했다.

실제로 기사를 찾아보니 한국영화 투자에 임하는 폭스의 각오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폭스는 제작비를 다 대고, 감독에게 창작에 관한 전권을 주는 대신 영화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갖는다.”

역시나 이것은 임상수 감독에게 전권이 주어진 상태의 영화였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감독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돈세탁을 하려는지 5만원권 지폐가 가득 담긴 트렁크가 실린 자동차가 출발한다. 그 차를 추적하는 일당. 속도감 있게 펼쳐지던 추적은 황당한 사고로 끝이 난다. 임상수 감독이 ‘개새끼들’이라는 대사만 4~5번 반복하며 직접 연기한 돈 가방 운반자는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졸지에 길 잃은 돈 가방들이 렉카차를 모는 미나(고준희)와 고물 처리장의 정숙(류현경)-야쿠부(샘 오취리) 커플, 그리고 애초에 돈 가방을 추적하던 무리의 인턴 지누(류승범)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사이좋게 돈 가방을 나눠 갖고 잘 먹고 잘 살 계획을 세우게 된다.

비타500 박스에 들어간 5만원권 지폐도 몇 천 만원이라는데 그 큰 트렁크에 들어간 돈은 몇 억은 될 듯하다. 그러나 애초 돈 가방의 주인은 이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들이 지닌 온갖 힘을 동원해 이들을 포획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한다.

 

 

지누-나미 일당은 애초에 악당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젊은이들일 뿐이었다. 이들이 좀 악한 사람들이었다면 돈 가방을 발견했을 때 혼자 독식하려고 갖은 꾀를 다 부리고 폭력을 불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먹을 만큼 각자 먹은 것으로 만족하고 숟가락을 더 휘두르지 않는다. 그러니 악당은 이들보다는 돈 가방을 되찾으려고 이들을 가만 두지 않는 회장 일당이라고 할 수 있다. 회장(김주혁)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얼마나 문란하게 노는지는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라 거론할 것도 없다.

사실 회장의 손가락 하나, 입 하나 뻥긋 하며 던져주는 돈 덩이를 먹고 사는 부하 상호(정원중)와 인수(김응수), 그리고 다른 인턴 창준(김형규)이 실무진이고 지누-나미 무리들을 괴롭히는 악당 역할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애초 돈의 주인은 지누-나미 일당이 아니라 회장이니 돈 가방을 안 내주고 버티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 그 돈의 주인 또한 회장이 아닐 확률 또한 높다.

회장이 부를 어떻게 축재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돈이 다 주식 투자하는 개미나 피 땀 흘려 그 조직을 위해 헌신하면서 실적을 만들어줬어도 보상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지누-나미 일당은 그야말로 알게 모르게 빼앗긴 시민들의 돈이 든 가방을 갖게 된 것이고, 시민의 돈을 앗아간 회장이 다시 돈 가방을 뺏으려드는 상징으로 볼 수 있겠다. 적어도 임상수식 ‘나의 절친 악당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임상수 감독은 ‘돈의 맛’으로 찾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 관객이 던진 질문에서 이 영화를 고안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관객은 ‘돈의 맛’에 등장하는 재벌가의 비서 주영작(김강우)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된다며, 힘들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입장에서 주영작 캐릭터가 88만원 세대의 고민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현 젊은 세대들이 공감하고 더 신나고 경쾌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감독 스스로도 자신을 젊은이들과 대립하는 위치에 세울 수 있는 50대라고 설명했고, 그래서 영화 속 50대 캐릭터로 직접 출연을 했다고도 설명했다. 현재 젊은 세대와 50대 이상의 갈등과 대립을 영화 속에 투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설명을 참고하자면 영화 속 지누-나미 일당과 회장(의 부하들)이 대립하는 간단한 구도가 어떤 의도에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뭘 그렇게 놀래?’라는 가사가 딱 들어맞을 듯한 결말 부분의 폭력장면은 정말 눈치 안 보고 막 가는 인상까지 풍긴다.

한편으로는 미적지근했던 ‘26년’같은 영화의 결말보다 훨씬 통쾌한 대리만족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식이 너무 임상수식이라서 관객과의 조우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호흡이 꽤 다른데 전반부는 ‘바람난 가족’‘그때 그사람들’처럼 반템포 느린 호흡으로 개연성을 쌓아가며 끌고 간다면 후반부는 ‘하녀’‘돈의 맛’처럼 시퀀스를 툭툭 던진다.

결과적으로 전반부는 잘 쌓이지 않은 채 조금 느슨하게 흘러가고 후반부는 날것으로 날아오는 폭탄을 맞는 기분이 들게 한다. 대놓고 씹하듯 내뱉는 대사나 극적인 순간에도 다큐멘터리처럼 화면을 찍어내는 저돌적인 면은 여전히 임상수의 것임을 드러내고, 지질하게 얻어터지고 포박되거나 쓰러진 남성과 달리 돌진하며 복수를 꾀하고 욕구 표현에 솔직한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 것도 임상수 아니면 또 누가 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필자처럼 임상수에 길들여진 관객에게나 먹힐 수 있는 약이 아닐까. 필자같이 길들여진 관객이야 ‘뭘 그렇게 놀래?’라고 묻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 박수 치며 그 위트에 박자를 맞출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들은 이걸 조롱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투자, 배급을 한 20세기폭스가 임상수 감독이 이렇게 영화를 찍게 내버려둔 것도 임상수에 길들여진 것인지, 마냥 새로운 뭔가를 해보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들 취향이 이런 것인지 묻고 싶기도 하다.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는 임상수 감독의 모습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보였다.
88만원 세대가 경쾌하고 명랑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그의 모습에 어쩌면 별점이 깎여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임상수식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의 주장대로 정말 영화를 보게 될 관객을 생각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접점을 조금 더 고려할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