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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무뢰한] 사랑, 찌르고 껴안는 그 징글징글함

 

2000년에 ‘킬리만자로’라는 진한 남성 누아르로 데뷔한 감독 오승욱의 두 번째 작품 ‘무뢰한’이 공개됐다. 1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끝에 나온 영화는 그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눅진 감성을 스크린에 발라낸 듯하다.

지워지지 않는 장판 얼룩처럼 변하지 않는 징글징글한 남녀의 관계를 담아내 정서적으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용의자 박준길(박성웅)을 쫓는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박준길이 나타날법한 곳을 찾다가 그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의 주변에서 잠복근무를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 버텨내야 하는 버거움과 의지할 데가 필요한 절망이 혼재하는 현실처럼 뒤엉킨다.

 

관음증으로 간음하는 형사와 지순하고 미련한 여자

한눈에 김혜경을 담은 듯 내내 그녀를 중심에 두고 자기 일을 하는 형사 정재곤. 김혜경의 방과 물건을 훔쳐보고 도청하고 미행하는 남자는 그 방식으로 간음하는 듯 보인다.

그 방식의 연장에서 박준길과 김혜경의 섹스를 도청하고 헐벗은 채 널브러진 둘을 훔쳐본 후 이어지는 육탄전은 이 영화가 팜므파탈이 등장하고 적과 적의 이상스런 꼬임을 눅눅하게 담은 누아르임을 제 방식대로 표출해낸 예술처럼 보인다.

 

 

배신이 아니야, 내 일을 한거야

끊임없이 유지되던 두 사람의 거리, 심지어 섹스를 했어도 붙지 못했던 그 거리가 완전히 0이 되는 순간은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이다.

끝까지 관음과 미행, 제멋대로의 남성호르몬을 분출하는 형사에게 여전히 지순하나 미련한 여자는 그간의 자신답지 않은, 오히려 형사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녀답지 않은 표현에 오열하며 무너진다.

각자의 상황 앞에 사랑의 결단과 확신을 유보하던 여자와 남자는 찌르고 껴안는 어쩌면 서로 반대되는 행동으로 종국에 이해에 이르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마침내 0이 된 그들의 거리를 이렇게나 징글징글하고 끔찍하게 그려낸 영화는 역시나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네'로 끝내지 않는 세련된 비범함을 보인다.

오열하는 여자를 뒤로 한참을 걷던 남자의 마지막 대사와 엔딩 타이틀은 이 영화가 부린 최고의 멋이자 조금이라도 미심쩍었던 남자의 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시종일관 혜경이라는 여자의 음습한 안개가 뒤덮은 듯 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재곤이 도드라질 기회를 준다. 이건 배우 김남길에게도 마찬가지의 기회였을 텐데 영화는 그 기회를 제대로 살려줬다.

엔딩 시퀀스만으로도 다양한 대화가 가능한 이 영화의 기획은 박찬욱 감독과 조영욱 음악 감독이다.

비 한 방울 안 내리지만 내내 우중충한 분위기에 핸드백에서 소주병을 꺼내 마시는 여자와 관음증처럼 간음하는 듯한 형사가 이끄는 영화는 박찬욱, 조영욱, 오승욱이라는 만든 이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볼 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완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