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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스파이] 스파이가 된 브리짓 존스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는 CIA요원이다. 이른바 전략분석하고 현장에 있는 요원에게 지령을 전달, 수행하게 도움을 주는 '내근직'이다. 지하 사무실을 덮치는 박쥐와 쥐 떼에도 아랑곳 않고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파트너다. CIA요원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이 멋지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수잔 덕분이다.

CIA의 수사를 무력화하고 핵무기를 밀매하려는 마피아의 협박에 아직 신분 노출이 안 된 요원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단 한 번도 현장에 투입된 적이 없고 날렵한 현장요원의 비주얼과도 거리가 먼, 한마디로 허를 찌를 만한 비밀병기로 수잔이 선택된다.

수잔 쿠퍼가 현장에 투입되면서부터 영화는 코미디와 액션이 절묘하게 섞인다. 탁월한 지략훈련이 된 수잔은 상부의 명령 그 이상으로 사건 속으로 침투한다. 타고난 친화력과 포용력, 순발력과 재치는 현장의 위기를 놀랍도록 잘 극복하게 만든다.

그 활약상에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을 한다 해도 초반에 보여준 완벽한 파트너로서의 수잔을 기억한다면 '말이 되네'로 바뀌게 된다. 자신이 파인에게 안내했던 대로 스스로의 몸을 컨트롤하는 것은 마치 그녀의 몸에 탑재된 스파이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짝사랑했던 파인(주드 로)과 지능은 떨어지고 허세만 가득한 포드(제이슨 스테이덤)가 삽질을 하고 있는 동안 적의 핵심으로 저돌적으로 진입하는 수잔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며 성장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남자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외모에 잔뜩 주눅 들고 짝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고 마는 자존감 약했던 수잔은 언더커버 임무를 하나 둘 거칠수록 더욱 더 당당한 수잔 쿠퍼만의 근육을 갖춰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 CIA요원에게 뿐만 아니라 적으로 등장하는 로즈 번과 주고받는 입심의 강도가 세지는 것을 보면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자존감 근육을 갖춘 수잔 쿠퍼가 되어가는 게 느껴진다.

마냥 엉뚱하지만 귀엽고, 일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게다가 짝사랑 하는 남자에 얼빵한 CIA동료까지 묘하게 삼각관계의 분위기를 풍기는 수잔의 모습을 보자니 생각나는 인물은 브리짓 존스다.

역시 외모 콤플렉스에 짝사랑하는 직장 상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던 브리짓 존스가 일과 사랑에서 서서히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자존감 높고 사랑스러운 브리짓 존스가 되어가는 모습은 고스란히 스파이가 되어가는 수잔 쿠퍼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에 사랑스런 브리짓 존스가 있다면 미국엔 입 거칠고 액션 좀 되는 수잔 쿠퍼가 있다고 하겠다.

 

‘스파이’는 개봉 전에 대사 번역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SNL코리아’ 작가진이 작업에 참여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자막에 다소 센 욕을 억지스럽게 사용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영화 속 캐릭터들 자체가 욕을, 특히 남녀성기를 모두 들먹이는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그 성기 표현이 그대로 남아있는 우리말 욕으로 자막을 냈으면 더 난리가 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볼 때 지금의 결과물은 번역 작업자들이 꽤 고심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스파이 알도가 영국식 억양을 배웠다는 드라마로 ‘다운튼 애비’를 말하는데 그걸 ‘셜록’이라고 옮긴 것을 볼 때 이 번역 작업자들에게 과한 친절 또는 지나친 대중성 고려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긴 하다.

영화의 엔딩신(뜻밖의 베드신) 후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후 현장에서 제대로 언더커버 임무를 수행하는 수잔 쿠퍼의 활약상을 이미지와 자막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를 넘나들며 각종 직업군으로 위장하고 엉뚱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수잔의 이야기는 애석하게도 자막 제공이 되지 않는다. 친절을 보여야 할 자막 작업은 이런 데 적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자막이 없더라도 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성이다.

그리고 엔드크레딧 끝에는 뜻밖의 베드신이 등장했던 엔딩 신에 이어서 재미난 쿠키가 하나 더 등장한다. 아주 귀엽고 웃기는 섹드립이 등장하는 쿠키인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내가 관람한 상영관의 경우 그 장면까지 보고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남은 관객이 없었다. 과연 이 쿠키 장면을 본 관객이 몇 명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