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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채피] '어쨌든' 닐 블롬캠프의 귀환

 

 

 

 

채피 CHAPPiE

 

 

'어쨌든' 닐 블롬캠프의 귀환

 

 

 

 

 

 

2016년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경찰의 역할을 수행하는 로봇 스카우트의 개발로 범죄 소탕 비율은 높아진다. 성과를 인정받는 로봇 개발자 디온(데브 파텔)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능 뿐만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본능까지 탑재한 로봇 개발에 열중한다. 한편 로봇이 인간을 초월하는 것을 경계하며 기계는 온전히 인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무기 개발자 빈센트(휴 잭맨)에게 디온의 승승장구는 눈엣가시 같다. 범죄로 한탕 하려는 일당들 역시 경찰 로봇을 무기력하게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로봇과 로봇 개발자들, 한탕을 노리는 일당들의 상황이 영화의 한 축씩 차지하며 <채피>를 채워나간다.  

 

 

 

2009 <디스트릭트9>으로 전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닐 블롬캠프는 이후 공개하는 작품마다 주목을 받아왔다. 동시에 <디스트릭트9>은 늘 그의 신작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은 2013년 작 <엘리시움>을 거쳐 닐 블롬캠프가 그의 페르소나랄 수 있는 샬토 코플리를 로봇 '채피'로 등장시키고 휴 잭맨, 시고니 위버 등 헐리웃 스타를 기용해 만든 <채피> 또한 <디스트릭트9>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채피> <엘리시움>으로 실망한 관객들이 닐 블롬캠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만든 결과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다시금 <디스트릭트9>의 자장 안으로 접근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센세이션이었던 <디스트릭트9>만큼의 호평을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엘리시움>보다는 낫지만 <디스트릭트9>보단 못하다는 관객 평이 유독 눈에 많이 보이는 것이 <채피>에 대한 관객 반응의 포지션을 가늠하게 한다.  

 

 

 

 

 

 

<디스트릭트9>을 능가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닐 블롬캠프의 색깔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게 만들며 여운을 남기는 <채피>의 요소들이 있다.

 

하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100% 인간의 감성을 담은 로봇을 만들기 위한 디온과 그에 의해 탄생한 채피, 디온을 방해하는 빈센트와 채피를 위기에 빠트리는 범죄조직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모습을 보면서 정의란 무엇이고 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 채피라는 로봇 자체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고 신생아 같은 로봇의 정체가 길들이는 자에 따라 결정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범죄를 꾀하는 일당이 가르친 것이 선이고 정의라고 여기며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채피의 모습은 씁쓸하다. 신생아 같은 채피가 행하는 정의의 행동은 모두가 공존하기 위해 지켜내야 하는 무엇을 위함이 아닌 특정한 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범죄로 번진다. 새삼 정의, 선의 구현이란 어느 한 편에 서서 그 편의 이득을 추구하는 게 아님을 상기했다. 정의를 구현함은 특정한 편에 서거나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공유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지키는 것임을 말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존재를 향한 세상의 폭력에 대한 생각이다. 거리의 불량소년들로부터 린치를 당하는 채피의 모습은 남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입장에 있는 존재가 겪는 고난의 모습으로 보인다. 내 이득에 반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무차별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채피. 그 모습은 정치적 대립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IS같은 조직의 테러처럼 세상의 정치와 종교에 만연한 편 가르기와 그 가르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연상시킨다.

 

<디스트릭트9>에서 점점 자신이 적으로 대했던 존재처럼 변하면서 스스로 고립됐던 존재를 다뤘던 닐 블롬캠프는 어쩌면 동떨어진 외도처럼 느껴졌던 <엘리시움>을 지나 <채피> <디스트릭트9>의 자장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왔고 남과 다른 존재에 눈길을 주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피>를 보며 드는 생각은 차라리 <디스트릭트9>의 속편을 만들지 하는 아쉬움이다. <디스트릭트9>과 비슷한 이야기를 할 듯 다가가는 영화는 이내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갸우뚱하게 만든다. 영화 시작과 함께 이 작품은 닐 블롬캠프의 <로보캅>이 되려는 것인가 싶었으나 덜 떨어진 일당과 신생아 같은 채피, 로봇 개발자 간의 갈등까지 촘촘하게 얽어도 모자란 재료를 단순하게 쏟아내는 영화를 보다보면 또다시 갸우뚱 하게 만든다. 빈센트와 디온의 갈등은 겉돌고 채피를 대하는 일당의 행동 변화, 채피 자체의 변화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느끼게 하려고 한 듯한 선택에 납득보단 의문이 쌓이기 때문이다.

 

 


 

 

<채피>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처럼 보인다. 휴 잭맨과 시고니 위버 등 헐리웃 스타, 욜란디와 닌자 등 남아공의 톱스타가 출연하고 어김없이 샬토 코플리도 등장함에도 영화 포스터에는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로봇 채피의 모습만 등장한다. 그것이 참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그림을 그리는 로봇으로 포스터 이미지를 일관되게 유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채피가 머물게 되는 범죄 조직의 아지트에는 벽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신생아 같은 채피에게서 인간의 감성을 끌어내는 수단으로도 그림 그리는 방법이 사용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고 느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의미가 있다. 그 누구의 잣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표현하라는 가르침을 인공지능이 탑재된 채피에게 가르치는 것 같다. 한편 누군가에 의해 칠해지거나 스스로 자유롭게 그리는 것을 방해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함께 보여준다. 채피가 엄마라고 부르는 욜란디(욜란디 비저)는 채피에게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게 하라고 외친다. <디스트릭트9>이 그랬던 것처럼 남다른 존재의 좀 다른 모습 때문에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야 함을 외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채피>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감독의 메시지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