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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이다] 칼날을 심은 눈을 뭉쳐 살포시 던지다

 

 

 

 

이다

 

칼날을 심은 눈을 뭉쳐 살포시 던지다

 

 

 

 

4:3비율의 화면에 담긴 아름다운 흑백 화면으로 고전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작품이 개봉한다. 50여 개가 넘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2월 말에 열릴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외국어영화상, 촬영상 부문에 후보 지명된 작품 <이다>가 그것이다. <이다>는 마치 하얀 눈 속에 날카로운 칼을 심어서 뭉친 눈덩이를 살포시 관객에게 던지는 듯한 작품이다. 순수한 눈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신을 향한 헌신을 약속하기 직전의 소녀 앞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그 후의 미세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소녀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며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  

 

 

 

 

 

 

 

 

2차 세계대전 독일 점령기에 무참히 자행된 유대인 학살이 남긴 상처와 우울함이 어느 하나 풀리지도, 치료되지도 않은 60년대의 폴란드. 자신이 유대인 학살로 인해 죽임 당한 부모를 둔 유대인인지도 알지 못한 채 보육원에서 자라 이제 수녀원 성혼식을 앞둔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 성혼식 전 연락이 되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아가타 쿠레샤)를 만나 함께 지내고 오는 게 어떻겠냐는 원장수녀의 제안에 마지못해 (수녀원 밖)세상에 나온 안나의 시간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시간이 된다. 자신도 몰랐던 유대인이라는 근원과 수녀복에 가려진 빨간 머리(흑백화면으로 관객 또한 그 색을 확인할 수 없다.)가 어머니 유전이라는 것, 실제 자신의 이름이 '이다'라는 것도 알게 된다. 유대인 학살로 인해 혈육을 잃은 상처를 판사라는 권력을 지닌 직업으로도 극복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해 술과 담배, 섹스에 젖어 사는 완다는 자신조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을 이다와 함께 한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수녀원 안에서의 엄격하고 엄숙한 생활을 했던 안나, 아니 이다는 흔히 생각하는 순수하고 신실한 예비수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모 완다를 만나고 돌아온 수녀원에서 엄숙한 식사자리의 침묵을 깨며 피식 웃는 이다의 모습은 이후 이야기의 분위기와 이다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마치 쨍 얼어붙은 것 같던 얼음에 쩌억 하며 금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 조용히 붓으로 예수상의 먼지를 닦고 칠을 하는 수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눈 쌓인 수녀원 뜰로 무거워보이는 예수상을 이고 옮겨 세우고 무덤처럼 움푹 패인 자리에 서서 예수상을 올려다보며 성호를 그리는 어린 수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은 영화의 중반 이후 무덤을 파헤친 자가 이다를 올려다보며 호소하는 모습과 대조된다. 신을 향한 헌신을 맹세한 이다는 이모를 만나 보내는 그 몇일을 통해 마치 구원을 호소하는 인간을 내려다보는 신의 위치에 서보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이다를 둘러싼 세상이 이다의 눈과 정신을 깨운다. 앞과 뒤의 이다가 변하지 않은 듯 변한, 그 미세한 차이를 짚어내고 짐작하게 하는 연출력으로 보인다.

 

 

'해보지도 않고 헌신을 약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이모의 말이 복선이라도 된 듯 예상치 못한 경험들을 통과하고 다시 걷는 이다의 엔딩은 내내 잔잔하던 영화에 대단한 균열을 일으키듯 무시무시하게 진동한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자는 제안도 뒤에 남긴 채, 자신을 향해오는 차와 오토바이에 역행하며 거친 호흡으로 걷는 이다와 마침내 미세하게 진동하듯 흔들리는 카메라는 ()선과 (), 결단과 고민, 확실함과 불안함을 모두 표현한다. (이 장면은 마치 <밀양>에서 신을 비웃듯, 조롱하듯 하늘을 보며 걷던 신애(전도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다>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폴란드의 분위기와 이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은 비극적인 역사가 만든 피의 희생을 겪은 사람들이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제 살길만 찾는 권력의 부패와 무책임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하는 선택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사람들은 지치고 무기력해지거나, 허망함이 쌓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이를 악물고 그들처럼 위선과 위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간다. 마치 지금 우리 세상의 모습과 크게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60년대의 폴란드의 단면을 그려낸 영화는 그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담았음에도 그 메시지는 지금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82분 러닝타임에 흑백필름으로 표현한 4:3비율의 화면, 하얗게 눈이 내린 수녀원의 모습과 흔들림 없이 고정된 카메라 워크까지 영화는 최소한의 표현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이야기에 극단적 양념도 치지 않았다. 그러나 장면장면, 상황상황을 곱씹을수록 그 쓴맛이 가시지 않고 더욱 강해진다. 하얀 눈 속에 칼날을 심어서 살포시 던진 것 같다는 감상은 그런 쓴 뒷맛이 만들어낸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영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은유 속에 현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아낸 경우가 있다. 은유라는 예술적 기법으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영화가 찬사를 받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을 읽는 아티스트들의 눈에도 이 세상이 어김없이 부패해 보인다는 반증일 테다.

 

 

 

 

 

 

순수했으나 순수와 결별하고 현실의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을 지닌 사람들을 비웃듯 자신이 잘 아는 울타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다의 모습은 그 걸음에 들어가는 힘과 달리 건강한 걸음은 아니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 속 60년대의 이다의 모습은 뒤틀린 세상에 찌들다 못해 마지못해 선택한 걸음을 걷는 현 시대의 우리의 모습 같아 끝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