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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빅 아이즈] 팀 버튼이 하고 싶었을 말


 




​​​​​​빅 아이즈

팀 버튼이 하고싶었을 말

 



마가렛(에이미 아담스)은 딸을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남편을 떠난다. 이혼. 1950년대, 남성을 위한 시대에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며 생계를 도모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녹록치 못하다. 잘하는 것은 오직 그림 그리는 것 하나라며 자신의 영혼에서 탄생한 큰 눈을 가진 소녀를 그리며 살아가는 마가렛. 자신이 처한 환경에 길들여진 듯 약하고 순진한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 월터(크리스토프 발츠)는 이내 기댈 안식처가 되어준다. 유쾌하고 신사적이며 부유해보이고 취향까지 닮은 월터는 마가렛이 영혼까지 쏟아바치고픈  '큰 눈'이 될것만 같다. 그렇게 마가렛은 월터의 성, 킨(Keane)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가렛의 큰 눈의 소녀 그림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모든 것이 어긋난다. 부와 명예 앞에 월터의 사기 기질은 본색을 드러내고 마가렛의 삶은 피폐해진다.



 



현실적 비율에서 벗어난 '큰 눈 소녀' 그림의 실제 주인이 누구냐를 놓고 벌어진 미술계 희대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빅 아이즈>는 자기 모습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의 여성의 삶과 예술에 있어 독창성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시대의 관객은 50년대의 마가렛을 보면 '도대체 왜?'라며 답답해하겠지만 그 마가렛이 50년대에만 존재했던 과거형이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여전한 여성인권의 문제, 나아가 사회적 약자의 인권문제에 대해 확장할 수 있는 생각거리를 남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예술가에게 있어 독창성은 저 깊은 영혼에서 나오는 진정성을 지닌 것임을 강조한다. 누군가 예술작품의 영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묻는다면 그 답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가의 근원이 될 것이고 그것이 곧 독창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환경이 아무리 치사하더라도 순응하던 마가렛이 단 하나 그냥 넘기지 못했던 것도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한 애착이었고, 그 이유는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자 그녀 자신과 같은 가치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손꼽힐만한 감독이 팀 버튼이 아닌가. 그가 창조해낸 산물들이 팀 버튼이 살며 겪은 환경과 경험이 만든 그 자신임을 여러 분석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안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그것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산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가치를 지키고 싶지 않을까. 모사와 모방이 판을 치고 독창적인 예술의 가치마저 훔침 당하는 시대를 보며 팀 버튼은 희대의 '빅 아이즈 사건'에 끌렸을 것 같다. 현재엔 발달한 기술이 진짜와 가짜를 가리기 힘겹게 만드는 장애요소라면  손으로 그린 그림 하나로 진위를 가릴 수 있었던 그 시대에는 여성을 억압했던 사회가 장애요소였다는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상업적 허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의 근간을 흔드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영화가 여전히 예술가의 독창성이 위협받을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독창적 예술가인 감독의 외침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빅 아이즈>는 음악, 미술, 의상 등 소위 팀 버튼 사단이 모두 모여 만든 팀 버튼 작품이지만 '이게 팀 버튼 영화야?' 싶을 정도로 그간 보여줬던 팀 버튼 특유의 색깔은 옅다. 하지만 독창적인 예술가로서 팀 버튼을 생각할 때 이 영화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이 세상을 향해 하고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하고싶었으리라 여겨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영화의 끝에 에필로그처럼 붙은 실제 월터와 마가렛의 '바로 지금' 모습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