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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현기증] 균열에 무참히 무너져 내린 내성적 가족의 참극

 

 

현기증

 

 

균열에 무참히 무너져 내린 내성적 가족의 참극        

 

 

 

어릴 적 성냥갑을 통째로 쏟아놓고 성냥을 사방으로 하나씩 쌓아 올리면서 탑을 쌓는 것으로 심심함을 달랬던 경험이 있다. 무너질까 쏟아질까 조심조심하며 쌓아 올려가지만 그 성냥탑은 구조 자체가 약하디 약해서 그다지 높게 올라가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지는 순간 안타까운 탄성과 함께 마지막까지 조심하지 못했던 그 순간에 대한 후회가 생긴다. 그러나 그 후회가 오래 갈 성격의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심각한 일의 시작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무너졌던 성냥탑 쌓기의 기억이 간혹 악몽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을 하거나 예민해져 있을 때 성냥탑 쌓기처럼 한 순간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망상이 불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불안함은 마인드 컨트롤을 못하고 작은 것에 흔들리는 성격상의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만한 것들이 때로는 큰 사건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고는 연쇄적 사고를 불러오기도 한다. 삶에 그런 태클이 걸려올 때 굴곡진 삶의 고리란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게 세상살이인 것 같다. 어쨌거나 그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 또한 세상살이의 과제일 것이다.  

이돈구 감독의 영화 <현기증>은 평범하게 보이는 어느 가족에게 닥친 연쇄적 파국을 담았다. 현기증이라는 어찌 보면 일상처럼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의 큰 비극을 만들고 그 비극이 가족 모든 일원의 삶에 연쇄적 균열을 일으켜 결국 극단적인 파국을 맞게 되는 이야기다. 별 거 아닐 것 같은 현상이 커다란 비극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퍼져 극단의 파국을 맞게 되는 이야기는 그러나, '그런 게 세상살이지' 라며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소름 끼치는 상황으로 흐른다. 그 파국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문제(비극)를 속으로만 파고 들었던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 모여서 단란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 엄마 순임(김영애), 큰 딸 영희(도지원), 큰 사위 상호(송일국), 막내 딸 꽃잎(김소은)은 여느 가족에서나 있을 법한 대화를 나눈다. 출산을 앞둔 영희는 임산부의 피로를 호소하고 의사인 남편 상호는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내며 아내 비위, 가족 비위를 맞추려 한다. 수능을 앞둔 꽃잎은 교사인 언니 영희의 잔소리에 퉁명스럽게 답하고 맛있게 미역국을 준비한 엄마 순임은 준비한 고기를 깜빡 잊고 넣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자식들은 엄마의 깜빡 증세에 치료받아야 하는 심각한 상태는 아닌지 걱정한다.   

 

 

이런 단란한 분위기는 앉았다 일어날 때 이는 아주 단순한 현기증이라는 증세가 가져온 무시무시한 사건을 통해 산산조각 직전의 균열을 맞는다. 영희는 엄마 순임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삭이지 못하고 순임은 죄책감에 스스로를 가둔다. 상호와 꽃잎은 상처받은 가족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만 고통과 비극은 이들의 삶도 가만두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가족 중 누구도 나서서 가족에게 닥친 비극적 사태를 정리하거나 감정의 골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 지닌 비극의 강도와 상처가 엄청나기 때문에 먼저 나서서 말할 입장도, 책임을 물을 상황도, 잘못을 빌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 가족은 스스로 자책하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원망과 분노를 삭이고 쌓으며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식탁에서 분위기를 띄울 듯 이야기를 풀어내던 상호도 그 슬픔의 무게에 갇혀 해결사로 나서지 못한다. 결국 영희 내외는 출가를 결정하게 되고 순임은 치매 증상에 자책감이 더해져 심리적으로 점점 무너져 내린다. 여기에 꽃잎은 교내 폭력에 의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된다. 모두가 고통과 비극적인 상태에 처해있으나 그 누구도 손을 뻗어 가족의 도움을 청하지도 제공하지도 않고 거울을 보듯 스스로의 문제에만 빠져든다. 더군다나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이젠 더 아픈 비수가 되어 손을 뻗을 기회마저 앗아가 버린다. 결국 가족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꿍하고 품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내성적이고 자기 고집이 강한 성격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문제에 고립되면서 파국을 맞는 극단의 어둠이 이 가족을 덮치게 됐다.

 

 

 

 

 

 

영화는 어둡고 가라앉은 비극적 이야기에 심리 스릴러의 스산한 분위기를 활용해 보는 내내 긴장감을 갖게 만든다. 분명 첫 장면과 시퀀스에서 충분한 단서를 던졌음을 영화를 다 본 후에 알게 되지만 보는 과정에서는 그 의미를 눈치챌 수 없었는데 그런 쫄깃한 연출력에 감탄했다. 감독은 전작 <가시꽃>에서도 그러했듯이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관객이 머릿속으로 그려내게 만들며 관객에게 초조한 긴장감을 주는 연출에 뛰어난 감각을 뽐낸다. 보여줌으로써 시각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게 하고 예측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심장을 조여오는 기법으로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그 덕에 배우들에게는 내면을 연기할 기회가 더 주어지는 셈이다. 특히 모성을 지닌 두 여성이 모성에 닥친 위기를 각자 품고 팽팽하게 맞서는 기운을 뿜어낸 배우 김영애와 도지원의 연기가 가장 돋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보인다. 전반적으로 촘촘하게 꽉 짜여진 느낌 대신 틈이 보이는 인상이 남는다. 엄마의 현기증으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가족이 겪는 시련과 비극이 집중적으로 촘촘하게 연결되고 강하게 응집됐다면 이야기의 힘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 같다. 막내 딸 꽃잎이 학교에서 겪게 되는 비극은 '현기증'으로 시작된 가족의 비극으로부터 나왔다기 보다는 이후 비극으로 치닫기 위한 설정으로 보여 작위적이라는 인상과 이야기의 중심을 흐린다는 인상을 남긴다. 배우 자신에게 잘 안 맞는 옷을 입은듯한 송일국 배우의 캐릭터도 영화의 틈으로 느껴졌다. 시원스럽게 시네마스코프 화면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틈처럼 느껴지는 설정들이 오히려 화면 자체에 많은 공백이 느껴지게 만들어 덜 채워진 식탁 앞에 앉은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