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ver the silver screen

[나의 독재자] 이 시대가 당신에게 부여한 배역은 무엇입니까?

 

나의 독재자

 

 

이 시대가 당신에게 부여한 배역은 무엇입니까?

 

 

 

 

 

흔히들 세상은 거대한 무대이고 삶은 연극이라는 비유를 한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연기를 하는 배우와 같다는 비유도 뒤따른다. 상황과 입장에 따른 역할을 수행하는 삶이 커다란 덩어리의 연극 같다고는 하지만 정해진 대본에 따라 연출되고 연기하는 연극과 삶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극을 위해 주어진 배역을 연기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극 속 인물이 되어야 하는 작업이지만 삶이 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인물이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하는 직업을 가진 배우들은 어떨까. 그들은 연기해야 할 배역과 자신의 본 모습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 간극을 극복하는 게 쉬울까.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 자체가 되는 기술을 말하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법'을 고려한다면 연기와 실생활을 구분 짓고 배역에 들어갔다 빠져 나오는 것에 혼돈이 일지 않을까 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이 된다.

영화 <나의 독재자>는 그런 걱정 반 호기심 반의 공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었고 아버지로서 떳떳하고 싶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의 20여 년에 걸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는 시대로부터 역할을 부여 받은 시민의 눈물겨운 삶의 이야기이자 부자간의 이해와 화해를 통해 대물림 되는 유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1972, 극단에 소속된 배우이긴 하지만 무대보다는 무대 밖에서 활동이 더 많은 성근(설경구)은 연극배우이자 아버지라는 역할을 갖고 있다. <리어왕>을 올리기 위해 연습하던 배우가 연출가와 불화를 일으키고 배역을 포기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대신 무대에 설 기회를 얻은 성근. 배우인 아버지를 떳떳하게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아들 태식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도 생긴 셈이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는 달리 실제 무대 위에 선 성근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이에 연출가에게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아들에게 보이고 만다. 그 일로 성근은 배우와 아버지라는 두 역할 모두에서 주저앉는 좌절을 맛본다. 그 때 성근에게 또 다른 역할 제의가 들어온다.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조짐을 보이자 청와대는 김일성의 대역을 만들어 정상회담에 임할 대통령이 사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성근에게 주어진 역할이 바로 김일성이 되는 것이다. 갖은 폭력과 고문으로 시작된 '캐스팅 과정'과 감금과 협박 속에서 진행되는 대본 작업, 메소드 기법으로 캐릭터를 완성하는 과정은 비정상적이고 가혹하다. 시대로부터 부여된 누설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역할이지만 연극배우와 아버지의 역할 모두에서 실패를 경험한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역할에 빠져든다. 몰입은 광기를 불러오고 광기는 서서히 성근 자신을 갉아먹고 주변 사람들마저 힘들게 만든다. 예상했던 정상회담은 무산되고 성근은 진행되다 엎어진 연극에서 내팽개쳐진 배우처럼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는 성근이 아닌 김일성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22년의 세월이 지나고 여전히 김일성의 모습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아들은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억지로 재개발을 앞둔 옛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시대가 부여한 역할과 그로 인해 입은 상처에서 회복될 수 있을까.  

 

 

 

 

 

 

70년대의 아버지 성근은 유신독재의 시대가 부여한 '김일성'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고 90년대의 아들 태식(박해일)은 자본주의 시대가 부여한 '채무자' 역할을 해내야 한다. 뜻하지 않았으나 시대의 속성이 생산해내고 부여한 역할은 반드시 해내야 하는 반강제적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며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김일성 되기'에 몰입한 아버지는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그 역할에 몰입하며 광기에 빠진 그의 상태는 아들인 태식의 삶을 뒤흔들었다. 성근은 김일성 역할에 몰입하며 무너진 아버지라는 배역을 회복하려 했다. 정작 22년이 지나도록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그 역할을 놓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과 바꾸다시피 했던 이유도 단 하나, 아들에게 제대로 된 배우의 모습을 보여주고 아버지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정은 아들의 삶에 부정적인 그늘만을 만들었다. 아들 태식은 그로부터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었고 지우려 했다. 아버지라는 역할을 자기 삶에서도 배제하려고 했다.

 

 

국민을 손아귀에 넣고 지배하려 했던 권력은 국민의 삶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역할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제각기 역할을 다하려고 했겠으나 시대가 부여한 역할에 의해 쌓이는 것은 오해와 갈등 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부정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진정성은 메소드 연기의 결과물로 쏟아져나오며 극적인 이해와 화해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무너졌던 부자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아버지라는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대물림을 하게 된다. 나름의 해피 엔딩 구조이긴 하지만 영화는 억압적인 권력과 기형적인 시대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부적합한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연극과 배우라는 소재를 빌려 표현해냈다.

 

 

 

 

 

<천하장사 마돈나><김씨 표류기>로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처한 소시민들의 삶을 어루만지듯 포근하게 다뤄온 이해준 감독은 <나의 독재자>에서 서슬 퍼런 시대에 상처받은 인물들을 앞세우면서도 따뜻한 유머와 포근한 기운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의 독재자>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와 그 주변인들을 통해 배우의 연기와 인간의 삶이 갖는 유기적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냈다. 그만큼 배우라면 누구라도 탐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배우들이 얼마나 벅차고 행복했을 지 상상이 간다. 배우로서 배우를 연기하고 인생의 의미를 담아내는 시나리오 속 인물에 빠져들고 연기한다는 것에 얼마나 흥분됐을까. 배우들이 느꼈을 벅참과 흥분은 고스란히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역도산>을 통해 외모에서부터 대단한 변신을 보여줬던 설경구의 점점 김일성 캐릭터에 빠져들며 미쳐버리는 연기는 관객마저도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했다. 올해 <경주><제보자>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을 선보이게 된 박해일도 앞선 영화들과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오열하는 박해일의 모습에 많은 관객이 함께 눈물 흘릴 것이다. 개성 있는 목소리로 어떤 배역에서든 눈길을 끌었던 이병준의 경우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하는 명연기를 보여주고, 웃음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냉랭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윤제문의 연기도 괄목할 만하다. 배우들로서 배역을 연기하고 삶을 연기로 채워내는 인물들은 분명히 매력적이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날 바짝 선 칼로 불꽃 튀는 연기를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