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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보이후드] 마음에 훈훈한 보일러 놓아준 듯한 감동

 

 

보이후드

 

마음에 훈훈한 보일러 놓아준 듯한 감동

 

 

 

우연하게 책장 한쪽에 놓인 지난 물건들 속에 일기장에 손이 가서 펼쳐 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입가엔 미소를 머금은 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펼쳐본 사진첩을 볼 때도 그랬고 난생 처음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던 때에도 그렇게 과거는 나를 붙잡고 한참을 빠져들게 만들었었다. '그래! 나 그 때 그랬었지. 그 때 그런 일들로 웃고 울었었지. 시간 참 빨리도 흘렀구나.' 이런 생각의 끝에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 그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이러네. 그 때부터 그걸 했던 걸 보면 난 정말 그걸 좋아하나 봐.' 하는 생각 말이다.

과거의 나는 동서남북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저 시간을 타고 왔지만 그 시간을 돌아보는 지금의 나는 그 동서남북을 지나 지금 여기에 도달한 결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과거의 나는 무수한 점들의 시간들을 거쳐 지금의 나로 이어졌고 어느 하나 끊어지지도 않고 용케도 나와 연결이 되어있었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진정 나로 인정하게 하는 흔적을 발견한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정체를 새삼 알게 되고 과거의 나를 끌어안게 된다. 진정 나를 다독이며 사랑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를 보고나니 자연스레 앨범이나 일기장을 펼쳐 들고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잘 왔구나' 나를 토닥이며 달래게 되고, '사람들은 다 이렇겠구나' 싶기도 했다.

중심인물인 소년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 6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12년의 모습을 매해 조금씩 조금씩 이어 붙이며 소년과 소년의 가족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는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느껴지는 오래오래 간직하고픈 작품이다.

6살 소년 메이슨이 굴다리 밑에 그렸던 그라피티 문양은 고스란히 10대 중반의 소년 메이슨의 방 벽에 그려져 있다. 동생과 티격태격하면서도 한결같이 우애 좋은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대학 진학까지 메이슨에게 좋은 본이 되어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하루벌이로 아이들을 키울 것처럼 보였던 엄마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는 꾸준히 학업에 매진했고 결국 교수가 되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엄마는 새로운 남자들을 만난다. 그런데 번번이 비슷한 이유로 갈등을 겪고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아이들은 고스란히 엄마의 실패를 목격하고 그 안에서 상처받고 참아내는 훈련을 하면서 성장한다. 떠도는 바람 같은 삶을 추구하며 아이들을 떠났던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어느새 점잖게 입을 줄도 알고 크리스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 정착했다. 배관공으로 일하던 이민자 남자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니 공부하라'는 엄마의 조언을 흘려 듣지 않았다.

 

 

12년의 세월을 몽타주 하듯 조각조각 붙여 이은 것 같지만 그들은 12년 사이의 무수한 점들로부터 촘촘하게 연결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무수한 어느 순간의 점으로부터 지금의 자신에 이르게 됐다. 분명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소품부터 캐릭터의 본성까지 연결성을 끊지 않고 잘 찾아 엮어낸 것에 논픽션 이상의 현실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해 영화가 택한 전략 또는 기획인 '12년이라는 세월을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도록 설정한 것'이 단순한 이슈를 위한 기획이 아닌 적절한 신의 한 수였음을 느끼게 된다. 비슷하게 닮은 각 연령대별 배우를 캐스팅해 시간이 넘어가는 시늉을 하던 픽션만 봐오던 관객에게 이 희한한 풍경의 픽션은 상상도 못했던 감흥을 전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두 시간이 훌쩍 지날 동안 매해의 조각조각을 이어 붙이며 관객들에게 잔잔한 호수의 물결과 산들 부는 숲의 바람처럼 다가가던 영화는 거의 끝에 다다라 호수에 돌을 던지듯, 숲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듯 쨍 하며 한 점을 찍는다. 이제 대학에 진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게 되는 아들을 보내며 엄마는 지난 시간들에 넋두리를 하듯 식탁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악착같이 열심히 매달려 달리면 그 끝에 언제나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삶이란 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순간 엄마도 깨달았던 것 같다. 한껏 힘주어 움켜쥐려 했으나 모래처럼, 물처럼 빠져나가고 마는 삶의 속성에 회한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둥지를 떠나는 아들은 엄마의 감정이 뭔지 알 리가 없다. 아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시작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삶이라는 것이 어떻다고 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있다 한들 그 사람이 말하는 삶이 정답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마저도 여전히 모를 것이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주어진 것이 전부인 것처럼 매달리고 달려가 잡으려 하는 게 또한 인간의 삶이 아닐까.

영화는 숨가쁘게 12년을 달려온 엄마와 아빠의 출발점에 마침내 아이들이 다다르면서 출발의 바통을 이어주고 받는 것 같다. 그게 세대의 유전일진대, 결국 앞 세대도 깨달음을 출발점이 아닌 도착점에서야 간신히 알게 되었듯 다음 세대도 미래에 올 깨달음을 지금은 결코 알 수 없는 게 그 유전의 맹점이 아닐까.

 

 

 

 

 

삶도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는 바람인데 바람을 잡으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겠는가. 바람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바람을 느끼고 바람에 실려간다는 그 순리를 삶에 적용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보이후드>는 삶을 그렇게 바라보는 통찰력을 담아낸 것 같다. 그래서 165분의 러닝타임이 모두 지나가면 그 통찰력이 주는 열기가 마음 속에 퍼져 온 몸에 훈훈한 기운을 전한다. 묵직한 덩어리의 양감으로 격한 감동의 눈물을 쏟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근하고 따뜻한 보일러가 마음 속 한 곳에서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듯, 포근히 누군가의 품에 안긴 듯 훈훈한 기운을 준다. 이런 류의 감동을 영화를 통해 느낀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덧)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의 제목을 '12(12 years)'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예12(12 years a slave)>과 유사해 혼란스러울 것을 우려해

    변경한 제목이 <보이후드(Boyhood)>라고 한다.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있는데 내년 오스카에서 강력한 작품상 후보가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을 예상해 본다.

    올해 <노예12년>이 작품상을 받은 데 이어 내년 오스카에서 <보이후드>가 좋은 결과를

    얻을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