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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기억이라는 약국에서 받아온 처방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기억이라는 약국에서 받아온 처방전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억이 짓누르는 악몽에 시달리는 33살의 폴(귀욤 고익스). 그 꿈이 여는 아침은 늘 정해진 듯 똑같다. 나의 나는 없고 타인의 나만 있는 삶처럼 보인다. 기억이 만든 생채기에 말문은 닫은 지 오래다.

이런 친구 옆에서 함께 하는 듯한 체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그런 체험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폴과 함께 다니면서 그가 겪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한 번의 만남으로 폴의 상처를 짐작하는 마담 프루스트(앤 르니)를 통해 단번에 나의 전부를 꿰뚫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분 또한 느끼게 된다. 3D, 4D도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인물에 밀착하게 되는 완전 입체 체험 영화라고나 할까. 그런 체험을 거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덤이다  

 

 

 

약을 구하러 약국에 들어가듯 기억을 마주하다

 

폴은 두 살 때 사고로 부모를 여읜다. 때문에 부모에 대한 기억 또한 희미하다. 남은 기억의 조각대로라면 엄마는 다정하고 포근하게 남았지만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놀라게 한 아빠에 대한 기억은 매우 부정적으로 남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같이 나온 사진에서도 엄마 사진만 오려서 자신만의 집에 보관한다. 마음의 상처로 말문을 닫은 채 살아온 폴은 이모들의 바람대로 '귀족적인 삶'을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그렇게 이모들이 이끄는 삶을 무미건조하게 살면서 슈게트를 입에 달고 사는 폴. 어느 날, 아래층에 사는 비밀스런 분위기의 마담 프루스트(앤 르니)를 알게 된다. 집을 개조해 정원처럼 꾸미고 각종 식물을 재배하는 마담 프루스트. 그녀가 아스파라거스 등을 넣고 만들었다는 차와 마들렌을 먹은 폴은 기절한 듯 정신을 잃고 어릴 적 부모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꿈처럼 기억해낸다. 그 체험을 반복하며 폴은 그리움과 상처, 애정과 증오를 함께 품게 했던 부모님과의 기억과 하나하나 마주하게 된다. 자신에게 생채기를 냈던 과거의 시간들을 직면하면서 이해와 치유의 시간을 맞는다.

 

 

 

 

이 영화를 보는 행위는 마치 폴이 겪는 과정을 곁에서 토닥이며 지켜보는 체험과도 같다. 폴을 대하는 사람들의 리액션을 담은 숏, 상담을 하는 의사나 마담 프루스트의 숏은 마치 폴이 잠든 사이 관객인 나를 향한 시선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생생하게 인물과 상황에 밀착한 듯한 체험은 나의 기억을 만나고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님에도 직접 체험하는 간접 치유 과정처럼 나의 마음도 녹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마담 프루스트

 

폴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데는 마담 프루스트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스쳐가는 시선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꿰뚫어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전부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치 카운슬러를 만나 깊은 상담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폴에게 마담 프루스트는 그런 존재이고 나에게도 마담 프루스트의 기운이 전해졌을 지경이다. 

마담 프루스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다. 그녀는 영화 속 뿌리를 깊게 내린 오래되고 두꺼운 나무와 같은 길을 간다. 마담 프루스트가 자리한 큰 나무 아래 우쿨렐레를 놓고 돌아서는 폴의 귀에 우클렐레 소리가 들린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현을 건드리는 그 순간은 프루스트 부인이 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과도 같다. '네 삶을 살라 vis ta vie' 는 마담 프루스트의 쪽지는 우클렐레와 함께 폴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폴은 아빠의 이름과 같은 음반 '아틸라 마르셀'을 들으면서 기억을 불러낸다. B면을 들었을 땐 엄마를 폭행하는 아빠의 모습이 사실은 탱고를 추듯 레슬링을 하는 모습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지만, A면을 들었을 땐 충격적인 사실과 직면하고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손을 뻗어 집게 되는 기억이 어떤 기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삶이란 좋은 기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다만 마담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나쁜 추억을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할 수 있는 선택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나에게 생채기를 내는 경험과 그 기억은 내 발목을 잡아 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채기가 내 삶 자체를 잡아먹게 놔둘지 그것을 극복하고 행복을 추구할 지의 선택은 나의 몫이란 메시지가 마음으로 스며든다.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로 쓸쓸함을 뼛속 깊이 새기게 만들었던 실뱅 쇼메 감독의 첫 실사 장편 영화라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아기자기한 소품에 촘촘하게 의미를 부여한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피아노와 우클렐레, 마들렌과 슈크레 등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있다.

가령 피아노는 영화 속에 중요한 소품 중 하나이다. 거대한 피아노는 이모들에 의해 폴의 삶에 밀착해있다. 피아노 조율하는 아저씨를 통해 마담 프루스트를 알게 되고 폴의 생일 선물이라고 들어오는 것도 전부 피아노 관련한 것들이다. 이 피아노는 폴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 중요한 소품이기도 하다. 샤워를 마치고 피아노 앞에 서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느끼는 폴 앞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이모가 피아노 덮개를 들어올리자 환하던 빛은 사라지고 어두운 그늘이 폴의 얼굴을 뒤덮는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 기억을 통해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을 때 비로소 꽤 중요한 암시를 담았음을 알게 된다.